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드짐> 과 <어둠의 핵심>을 힘겹고 읽고 난 후 당분간 콘래드 소설은 읽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문지책방에 들렀다가,자석처럼 제목에 끌려 덥석 <비밀요원>을 가져왔다.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평범함을 허락(?)하지 않는 소설이었다. 심지어 아주아주 재미나게 읽었다.
"(...) 악과 어리석음 인간의 저질적인 공포를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분위기였다(...)"/21쪽
'비밀요원' 이란 제목에 걸맞게, 벌록의 직업은 '비밀요원' 이다. 그런데 그가 실질적으로 하게 되는 일 보다,그의 생김새, 그가 직업으로 비밀요원을 선택하게 된 이유들이 웃음나게 한다. 어떤 비장함도, 특별함도 없다. 그런 이들이 누군가의 지령으로 사회를 교란시킬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보였다. 콘래드는 애초부터 스파이의 멋짐을 그려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악과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혁명을 꿈꾸는 이들도, 비밀요원을 자처한 인물도,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벌록이란 사내가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기는 할까... 독자가 궁금해 할 그 즈음 콘래드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폭탄을 투척한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누군가와 살아가는 것도 '비밀요원'에 포함시킨다면, 진짜 비밀 요원은 벌록이 아니라..벌록 부인이라고 해야 할테니까.. 나는 그녀의 존재를 정말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더랬다.정말 조용하게 벌록의 부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 그녀의 속마음이 들어난 순간은, 그래서 오히려 안타까웠고..그녀가 행복해 지길 바랐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들이니까....
"광기 혹은 절망의 행위에는 도저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영원히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외울 정도였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 건장한 무정부주의자는 고개를 떨구고 긴 몽상에 빠졌다"/358쪽
벌록의 죽음도, 벌록 부인의 죽음도, 우리의 어리석음이 광기로 때로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죽지 않은 이들이라고 해서..덜 절망하거나 덜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지만... 무튼 벌록이 비밀요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했던 독자에게 아주 멋진 일격을 남겼다.조용하기만 했던 벌록부인의 존재감 덕분에.<비밀요원>은 단순히 스파이에 관한 소설이 아니란 사실을 내게 환기시켜주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깊숙히 자리한 광기와 절망에 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