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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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작가의 마지막 증언, 제발트가 남긴 문학적 유산을 탐구한 <기억의 유령>. 2001년 12월 14일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독일 작가 W. G. 제발트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발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기억의 유령>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의 심층 인터뷰와 평론가들의 에세이를 모은 책입니다. 문학적 거장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제발트의 문학 세계는 마치 사냥꾼과 같습니다. 역사의 잿더미 속에서 잊혀진 이야기들을 발굴해내는 집요한 탐정이었습니다. 1944년 독일 알고이의 베르타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알프스 고산 지대에서 꽁꽁 언 시신과 함께 지내곤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한 제발트는 스물두 살에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나치가 아닌 체하는 교수들과 과거를 회피하는 독일 사회에 대한 깊은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가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에서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며 브리티시 문학번역원의 초대 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그토록 우연의 일치가 많은 글을 읽고 그 배경이 심란하게도 자신의 삶과 같은 곳임을 알면 기분이 묘하다"라는 평론가의 말처럼, 제발트의 작품은 기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문학적 사냥은 과거와 현재, 개인사와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한강의 문학적 질문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와 닮아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과거는 침묵 속에 묻어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윤리의 기반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제발트와 한강이 나란히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과거의 고통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자, 그 질문에 스스로를 담보로 삼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둘의 문학은 모두 죽은 자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산 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거대한 가능성에 대한 문학적 사유이자 실험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말함으로써 가능한 일들, 그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이들이 추구하는 문학의 윤리적 심연이며, 제발트와 한강이라는 작가를 시대 너머로 연결 짓는 가장 깊은 지점입니다.


제발트가 유령 사냥꾼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그의 독특한 문학적 시도 때문입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과 그 일의 불가능성을 다루는 데 헌신했습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목소리들이 현재에 어떻게 메아리치는지를 탐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그의 작품들은 독일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민자들』과 『아우스터리츠』는 "유럽의 유대인들이 겪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그의 이해도가 여느 독일 작가들보다 독보적"임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비평가 루스 프랭클린은 "제발트처럼 도덕적 지위가 있는 작가만이 이런 책을 쓸 엄두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제발트가 문학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창안한 산문 픽션(prose fiction)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 때문입니다. 현대 소설에서 독일의 산문 전통을 부활시켜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구체화한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입니다.


제발트는 자신의 창작 방법을 개를 관찰하면서 터득했다고 고백합니다. "원래 체계적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말하자면 개가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과 같은 방식입니다. 코가 이끄는 대로 다니는 개를 보면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개는 찾던 걸 반드시 찾아요."라고 말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소설과 에세이, 역사서와 회고록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독특한 미로 같은 구조의 자유로운 접근법 덕분에 제발트의 문장을 따라가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제발트의 문학적 탐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시적 접근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사실은 해방 이후의 사진들이었고, 실제 홀로코스트의 현장은 "그 이전에 안 보이는 데서 신속히 처리되었던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예리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흐릿한 흑백사진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사진은 기억을 보존하는 매체이지만, 동시에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발트의 문학은 서늘한 사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의 문학이 지닌 유혹적 요소들은 과거를 회복하고 삼키고 대체합니다. 이 과정에서 극도로 파괴적인 혼란 상태는 더없이 정확하고 절제된 말로 표현됩니다. 마치 아름다운 선율로 포장된 절망의 노래와 같습니다.


<기억의 유령>에서는 작가의 내밀한 고백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발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는 힌트도 가득합니다. 『이민자들』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전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온 존트호펜의 학교 선생님이 자살했다는 전화였다고 말이죠. 그의 작품이 어떻게 개인적 경험과 역사적 사건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발트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것은 독일 사회의 집단 기억상실과 모의된 침묵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대한 부모의 침묵, 대학 시절 과거를 회피하고 '나치가 아닌 체하는' 교수들에 대한 좌절감"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제발트는 스스로 기억 상실을 유도한 독일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기억하는 일을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의 문학은 이러한 침묵에 대한 치열한 반박이었습니다.





개정증보판 <기억의 유령> 부록에는 제발트의 소설에 영감을 준 버지니아 울프의 「나방의 죽음」과 프란츠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 그리고 문학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발트의 어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방의 죽음」과 「사냥꾼 그라쿠스」 모두 상징이자 은유로서 사용됩니다. 각각 ‘무력하지만 지속적인 생명’, ‘끝나지 않는 죽음 이후의 여정’을 상기시킵니다. 제발트는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얽히는가, 죽음을 지나치고도 과거는 여전히 우리를 떠도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역사와 기억, 트라우마와 치유라는 주제에 관심있다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문학적 문지기 제발트의 문학 세계로 들어서보세요. <기억의 유령>은 그의 세계를 향한 입문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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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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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좀먹는 건 스트레스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회피하려는 태도라는 걸 일깨워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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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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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에서 편안한 자세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 이 정도의 편안함은 언젠가부터 기본값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전 인류 역사상 가장 편안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안함의 습격>은 이 편안함이야말로 우리 삶을 좀먹는 가장 교묘한 위협이라고 말합니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이스터는 수년간 불편함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추적하며 현대인이 잃어버린 생존 본능과 불편함의 가치를 들여다봅니다.


알래스카 오지에서 33일간 순록 사냥이라는 극한 체험을 감행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이 책은 그의 체험을 중심축으로 하되 진화심리학, 뇌과학, 운동생리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을 횡단하며 너무 편한 삶의 불편한 진실을 전합니다.


목차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나타납니다. 죽지 않을 정도의 고생을 해봐야 한다, 따분함을 즐겨라, 배고픔을 느껴라, 매일 죽음을 생각하라, 짐을 날라라. 


산업화 이후 인간은 편리함이라는 목표 아래 각종 기술과 제도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점점 불편을 회피하는 존재가 되어갑니다. 그런데 <편안함의 습격>은 우리가 피하려 하는 불편함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뇌는 본래 환경의 불확실성에 대응하면서 발달해왔으며 약간의 불편함은 오히려 창의력, 인지능력, 회복탄력성을 자극한다는 것이 신경과학계의 중론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편안함은 오히려 뇌를 과소동원 상태로 몰아넣고 있으며 집중력 저하와 무기력, 만성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이 책의 백미는 알래스카에서의 체험기입니다. 인터넷도 일정도 인공조명도 없는 야생에서의 삶은 저자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매 순간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식량 확보와 생존에 신경 써야 하는 시간 속에서 그는 잊고 지냈던 감각들을 되찾게 됩니다. 불편함 속에서만 가능했던 일입니다.


알래스카의 33일은 우리 모두가 지닌 생존 본능을 깨우는 의식 같은 장면입니다. 저자는 원시적 활동이 인간의 DNA에 새겨진 감각을 되살리더라고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육체적 한계를 느낀 게 언제인지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끔찍할 정도로 두려워한다. '편안함에 의한 잠식'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채는 것을." - 책 속에서


현대인의 정신적 허약함은 실패와 불확실성에 무감각해진 데 있다고 합니다. 매년 한 번은 확실히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극한 도전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같은 도전은 뇌와 몸에 새로운 자극을 줍니다. 실패가 허용되는 공간에서 오히려 자존감을 높이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되찾게 해주는 중요한 장치가 됩니다.


편안함은 단지 정신적 문제만 유발하지 않습니다. 신체에도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칩니다. 하루 8시간 이상 앉아 있는 현대인은 단축된 수명, 각종 대사 질환, 만성 통증에 직면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의 사냥 여정 동안 저자는 하루 종일 걷고, 무거운 것을 들고, 실제로 생존을 위해 신체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인간의 몸이 지속적인 움직임을 위해 설계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일상 속 작은 불편함은 오히려 삶의 감각을 깨우게 됩니다.


지루함에 대한 회피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폰이 항상 손에 들려 있는 시대, 우리는 단 몇 분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견디지 못합니다.


정보를 계속 소비하는 뇌는 단기 보상에만 반응하고 깊은 사고나 통찰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명상, 산책, 사색은 그래서 더욱 절실합니다. 약간의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결국 창의성과 정신적 안정성의 관건입니다.


저자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은 고통에 대한 내성, 불편함을 통제하는 힘 그리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정서적 내구력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불편함이라는 낯선 영역에서만 다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존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작은 불편이 삶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전략임을 깨닫게 됩니다. 편안함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단지 무디게 할 뿐입니다.


현대인의 끝없는 편안함 추구가 우리를 망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건 의도적 불편함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편안함의 습격>.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실천 가능한 조언과 함께 알래스카 오지에서의 모험담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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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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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폴 윤의 단편소설집 <벌집과 꿀>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것은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주민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리적 이주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직장으로, 고향에서 타지로, 꿈꾸던 모습에서 현실의 모습으로. 폴 윤 작가는 이 보편적 경험을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특수한 상황과 절묘하게 겹쳐놓았습니다.


간결하고 정제된 문장 안에 깊은 상실감과 이방인의 고독을 녹여냅니다. <벌집과 꿀>에서는 여러 대륙과 시간대를 넘나들며 전쟁, 분단, 이주, 유배, 상실을 겪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폴 윤 작가의 시선은 그 떠남 자체보다, 떠난 이후에도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존엄성과 관계의 흔적에 집중합니다. 인간의 상실과 회복, 기억의 궤적을 성찰하게 합니다.





<벌집과 꿀>은 총 일곱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연결된 주제를 공유하지만, 각 단편은 서로 독립적입니다. 어느 이야기에서는 전쟁 이후 아내를 잃고 혼자 남겨진 남성이 나오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유배지에서 술을 빚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삶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으려 애쓰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가 발견했던 무언가가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갈망이라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 p21


첫 번째 「보선」은 출소한 한국계 청년 보가 미국 북부의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이야기입니다. 갈망조차 잃어버린 공허함을 지닌 보에게 카로라는 남자와 나누는 대화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듭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으려는 폴 윤 작가의 마법이 펼쳐집니다.


「코마로프」는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개인의 내밀한 그리움으로 보여줍니다. 탈북 후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주연은 소련 출신 권투선수 코마로프와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바다의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듯 자신이 남편을 쉬지 않고 떠올리는 것처럼" 단절의 현실에서 비롯된 아릿한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세 번째 단편 「역참에서」는 에도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을 호송하는 사무라이의 시점에서 서술됩니다. 디아스포라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눈을 통해 이주와 정체성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시점이 흥미롭습니다.


"그 연극은 더 이상 목수가 아니게 된 목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집 짓는 일만 하고 살아온 나머지, 그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버립니다."라며 작중 인물이 관람한 연극 이야기는 소설 전체의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잃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목수들인 셈이라고 말이죠.


「크로머」는 탈북한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 해리와 그레이스의 이야기입니다. 런던 외곽 한인타운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복잡한 감정의 결들이 숨어 있습니다.


"해리의 내면에 붙들려 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빠져나가 사라져버렸다."라며 기억조차 덧없다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2세대 이주민의 복잡한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표제작 「벌집과 꿀」은 19세기 말 연해주에 부임한 러시아 장교의 편지 형식으로 펼치집니다. 고려인 정착촌을 관리하는 러시아인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작품은 제국주의 시대의 복잡한 권력관계를 그려냅니다.


"그래요, 우린 비명을 지릅니다. 잠을 못 자고요. 그럼에도 내일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고려인들이 던지는 말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말입니다.


벌집과 꿀이라는 제목은 공동체와 개인, 노동과 결실, 집단성과 개별성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벌들이 모여 만드는 벌집은 집단의 힘을, 그 안에서 나오는 꿀은 개인의 달콤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려인」은 사할린에서 자란 막심이 교도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뿌리와 가정에 대한 모호한 감정 그리고 세대 간의 역사적 짐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마지막 단편 「달의 골짜기」는 한국전쟁 후 기억도 가물거리는 고향으로 돌아온 동수의 이야기입니다. 폐허가 된 농가에서 고립된 삶을 시작하면서 고아 남매 은혜와 운식을 머물도록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불안정한 기억과 트라우마가 그를 점점 옥죄는데. 돌아온 자의 또 다른 고립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을 두드립니다.





『벌집과 꿀』에서 폴 윤 작가는 특정 집단의 경험을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장시킵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현대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존재론적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절제되고 시적이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놓치지 않는 폴 윤 작가의 문체가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과 충분히 화해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에도시대 일본에서 현대 런던까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어 읽는 맛도 좋습니다.


서제인 번역가가 옮긴이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한 사람의 마음속 빈 곳이 어떻게 위안을 주는 풍경을 빚어내는 거푸집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어로 쓰인 한국인의 이야기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 독자에게 돌아오는 순환을 통해 저마다의 이유로 소속감의 위기를 겪는 우리들에게 위로를 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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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너와 나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최소한의 삶의 덕목
엄성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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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냉소가 일상화된 시대에 어른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엄성우 교수가 삶의 본질적인 질문에 담담하면서도 예리하게 응답하는 책입니다. 도덕 교과서를 넘어 삶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준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인생 지침서입니다.


도덕 선생님들의 선생님이라 불리는 저자가 친근한 문체로 일상의 고민을 끌어안고 천천히 사유해볼 수 있도록 돕는 형식이 매력적입니다. 겸손, 감사, 효, 신뢰, 정직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은 고리타분한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수많은 고민과 딜레마에 대한 실천적 안내입니다.


도둑질도 거짓말도 나쁘다는 걸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윤리적으로 그릇된 선택을 합니다. 저자는 덕목을 '안다'는 것과 덕목을 '실천한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익숙한 단어일지라도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삶에서 길을 잃기 쉽다는 겁니다.





겸손이란 덕목은 겉으로 조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할지를 결정짓는 내면의 태도라고 합니다. 겸손을 예의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자기비하나 위선으로 왜곡될 수 있는 겁니다.


"겸손은 자기 비하와 오만 사이의 중용이다.- p19


결국 겸손은 자신 있게 고개 숙일 수 있는 힘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과 한계를 객관적으로 아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겸손과 자존감의 관계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겸손이 형성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탁월함을 숨기기 위한 가식도,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진짜 겸손은 아닙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다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윤리적 자세로서의 겸손, 저자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려냅니다.


"감사는 나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존재에 대한 마음의 표현이다." - p47


감사는 단순히 특정 행위에 대한 보답을 넘어서, 타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이자 삶에서 외로움을 덜어내는 정서적 행위라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감사를 통해 인간관계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으며, 그 섬세함이 곧 성숙한 인격의 증표가 됩니다.


저자는 감사의 실천에서 무엇이 지나친 감사이고 모자란 감사인지, 상황에 따른 분별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좋은 의도로 행동했다고 가정하는 태도를 뜻하는 호의 추정의 원칙이야말로 불신의 시대에 중요한 태도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효에 대한 담론은 늘 논쟁적입니다.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서는 전통적인 효의 개념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가족관계에 걸맞은 관계적 덕목으로서의 효를 재구성합니다. 일방적인 순종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도덕성을 강화하는 쌍방향적 관계로서의 효를 뜻합니다.


부모가 부모다움을 갖추지 못했을 때 자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무조건적인 순종도 반항도 아닌, 공감과 거리두기 사이의 균형 감각을 강조하는 저자의 조언이 와닿습니다.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도 성숙해진다는 깨달음을 일깨워줍니다.


신뢰 덕목은 단순히 믿는다는 말보다 훨씬 복잡한 개념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자는 신뢰를 위험 감수적 행위로 봅니다. 상대방이 그 믿음을 저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채 믿음을 주는 겁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신뢰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겁니다.


고대 그리스의 피디아스와 다몬 이야기부터 오늘날의 인간관계까지 신뢰에 얽힌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 덕목의 가치를 조명합니다.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과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한 실천적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직 덕목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타인을 속이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직은 상대의 판단력을 존중하는 윤리적 실천인 셈입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헛소리는 그 자체로 자기도 속고 타인도 속이게 만듭니다. 이제는 AI도 헛소리를 하는 세상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정직한 태도를 유지하기란 그만큼 어렵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철학이 일러주는 어른다움의 윤리학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고리타분할 수 있는 윤리학을 우리 일상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다섯 가지 덕목은 외적 행동 이전에 내면의 태도를 가꾸는 일입니다. 엄성우 교수가 제안하는 어른다움은 실천 가능한 윤리이며 삶의 본질적인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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