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예술로 여행하기

저자 함혜리

파람북

2025-02-14

여행 > 프랑스여행 > 프랑스여행 가이드북

여행 > 테마여행 > 미술관/박물관/예술기행





예술의 나라, 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그 핵심이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여행길이 자유로워지면서 오랜만에 찾은 파리에서 그걸 제대로 실감했다. 오랜 세월 공들여 가꾼 도시 파리는 아름답다. 잘 정비된 도로변으로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그 모든 길이 만나고 헤어지며 만들어지는 지점에는 광장이나 분수, 조각 같은 역사적 기념물이 있다. 겉만 조형적으로 아름답다고 하면 파리가 아니다. 파리에 있는 수많은 미술관이 소장한 다양한 미술품은 인류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문화와 정신의 빛나는 결정체들이다. 세계의 문화수도라는 자부심 또한 무리가 아니다.



진귀한 보석을 품은 광산과도 같은 미술관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미술관과 박물관 등 문화자산이 빼곡한 파리는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도시다. 가볼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가장 핵심부터 공략하는 것이 방법이다. 파리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과 박물관 세 곳을 꼽아보자면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퐁피두 센터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인 만큼 소장 작품과 해외 유수의 박물관과 연계한 기획전도 볼 만하다. 지난 2022년 가을에 갔을 때 ‘세상의 사물들’이라는 주제로 정물화 특별전을 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현대까지 물건을 표현하는 인간의 심리와 기법을 다 모아놓았던 전시였다. 세상의 모든 물건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진풍경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브랜드화에 앞장서 프랑스 국내와 해외로 확장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철도역이었다. 국제박람회에 맞춰 철도역의 기능은 물론 박람회 참관인들이 묵을 호텔 테르미누스까지 갖춘 도심형 역으로 지어졌다. 건축가 빅토르 랄루는 거대한 기관차 홀의 쇠 박공을 비롯해 모든 구조와 장식이 주변의 우아한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설계했다. 2년 만에 세워진 건물의 홀은 유리로 덮이고 측창은 아치 형태를 이뤘으며 여행자들의 신메르퀴르(머큐리,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가 기관차 홀의 쇠 박공 꼭대기를 장식했다. 하지만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철도역은 곧 운영난을 맞았고, 장거리 노선은 1939년 중단됐다. 1945년에는 포로로 잡혔다가 귀향하는 군인들을 위한 임시 숙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1962년에는 오슨 웰스의 영화 <심판>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은 철거를 고려하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서구의 근대가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거쳐 인상주의와 20세기 초 후기 인상주의, 즉 큐비즘 직전까지 회화와 조각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좀 더 학구적인 산책을 원한다면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문화의 나라답게 도서관도 정말 멋지다. 파리에는 현대식 건물인 미테랑 도서관과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리슐리외 도서관 등 2곳의 국립도서관이 있다. 미테랑 도서관은 미테랑 대통령의 대업인 ‘그랑 프로제(Grands Projets)’ 중 하나로 건립되어 1995년 개관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국제적인 설계 공모에서 우승한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의 설계로 지어진 거대하고, 미니멀한 건축물은 현대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은 계획이 발표됐을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명품기업에 파리의 귀중한 공간을 내준다.’, ‘영혼을 팔았다.’ 등 반론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비난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개관 이후 상설 컬렉션 전과 함께 훌륭한 기획전을 선보이면서 트렌드를 선도하는

파리의 문화명소, 나아가 건축이 아름다운 세계적 미술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현대 예술의 창조를 촉진하고 지지하기 위한 열망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이 성공하면서 ‘문화기업’이라는 LVMH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됐다. 이런 멋진 미술관을 파리에 세움으로써 루이뷔통이 얻게 된 무형의 가치는 수치로는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론 강변을 끼고 우아하고 고전적인 파사드가 길게 늘어서 있는 길이 매력적이다. 건물의 1층은 대부분 카페와 레스토랑이어서 테라스에서 차 마시고,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보르도의 상징과도 같은 피에르 다리 역시 우아하고 아름답다. 특히 해 질 녘 노을빛이 가로등에 비칠 때의 다리는 꿈속에서 본 듯한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와인 향을 품은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도시에 가스등 불이 켜질 때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미술관을 돌아보면서 강하게 다가온 것은 위대한 모성의 힘이었다. 툴루즈-로트레크의 어머니 아델 백작 부인은 재산이라면 남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불구의 몸이 된 큰아들에게 늘 마음의 짐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로트레크가 그린 아델 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있고,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파리의 사창가에서 여자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로트레크의 아버지는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걱정하면서도 늘 모성애로 감싸며 아들을 응원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각 작품이 나름의 스토리가 있고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투레트 수도원’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빛으로 빚어진 영성의 공간, 라투레트 수도원은 자연광을 건축의 기본으로 삼고 빛을 능숙하게 사용했던 르코르뷔지에의 예술혼과 재능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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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저자 홍한별

위고

2025-02-15

인문학 > 인문 에세이

외국어 > 번역





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아니, 그 선생님은 말 같은 것을 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에 석고상을 들고 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한숨을 토하듯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게 갓 태어난 것처럼 순결하고 눈부신 하얀 머리의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말없이 내어준 과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새하얀 형체를 종이 위에 그림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날의 준비물인 스케치북과 4B 연필만을 가지고. 흰 도화지와 시커먼 연필을 가지고 어떻게 하얀 것을 그리라는 걸까. 막막했지만 흰 종이에 더듬더듬 선을 그어 형상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댈수록 석고상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흰색을 그린다는 불능한 과제.



흰 고래는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멜빌은 이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다. 그렇게 글자들을 새카맣게 포개어 그리고 남은 중앙의 빈 공간,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 대부분 - 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보코프가 쌓아 올린 무한한 주석의 탑은 번역이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다(나보코프가 열거한 것만 들자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문법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주석의 탑이 뻗으며 여백도 손실되었다. 상상의 여지도, 모호함의 가능성도).



나도 번역이라는 일이 탐정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탐정소설 속 탐정의 목표는 범죄가 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이다. 탐정이 모든 정황과 맥락을 고려해 가장 그럴듯한 한 가지 서사를 완성하듯이, 번역가도 단어들의 단서를 모아 매끈한 하나의 문장, 빈틈없는 하나의 줄거리를 만든다. 번역가는 흩어진 의미의 조각들을 이렇게 맞추어보고 저렇게 맞추어보며 도무지 옮겨지지 않는 것을 옮기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퍼즐이 풀린다. 비어 있는 한 자리에 딱 맞는 단서/단어를 끼워 맞추자 이야기가 완결된다. 이렇게 문장을 완성할 때의 희열. 결국 번역을 하는 이유는 번역이 이런 일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찾아오는 완성의 감각.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What do you think?’ 같은 간단한 문장이 수십 가지로 번역되는 것이다.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간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맥락, 어조, 정서, 분위기, 성격, 암시, 어감, 문화적 인유, 의도.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샤일록이 “맹세, 맹세, 나는 하늘에 맹세했소. 내 영혼이 위증을 해야 하오?”라며 자신의 계약을 신에게 한 맹세에 동일시하며 신성시하려고 하더라도 계약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한, 해석의 차이는 필연이다. 그 차이를 통합하고 이해하려면 자비가 필요하다.

언어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번역에서 자비 없는 축어역을 고집한다면, 어떤 불충도 허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미와 행간의 침묵을 무시한 채 단어만 번역하려 한다면 언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파괴되는 치명적 결과를 낳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어쩌면 번역은 변신?몸을 바꾸는 일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서는” 번역,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걱정이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마치 내가 저자인 것처럼, 내가 저자라고 착각하고 마치 내 글을 쓰듯 글을 쓰게 될까 봐 두렵다는 걸까? 번역 과정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끈이 끊어지고, 단어가, 이야기가 변신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릴까 봐, 저자를 배신하는 배신자가 될까 봐, 번역으로 원문을 손상시킬까 봐? 뻔뻔스럽게 살을 베어내고 글을 다듬으며 문학성을 지워버릴까 봐?



단어를 옮길 수도 의미를 옮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번역가에게는, 아예 단어도 의미도 아닌 감각으로 이루어진 시를 번역하는 경험, 읽을 수 없는 시를 읽을 수 없는 시로 번역하며 언어를 창조할 자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아르토처럼 번역본이 원본보다 더 원본에 가까운 것이라고 선언하는 거다. 번역은 순수 언어에 더 가까워진 것이므로 사실 그 말이 맞다.



나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러운 논리로 글을 읽게 하려고 어쩌면 나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이 개입할 때가 있다. 마치 편집자가 된 것처럼 원문에 가위를 댈 때도 있다(있는 것을 잘라내거나 없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아니다. 문장을 합하거나 나누거나 문장구조를 뒤틀거나 긍정과 부정을 뒤집을 때가 있다). 그런데 번역 원고를 다듬고 고치다가 피츠제럴드처럼 진부함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번역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편안한 한국어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을 흉내 내려 하는데 번역가를 흉내 내어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이런 교환과 충돌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이 최대로 이끌어내어지기도 한다. 내가 쓰는 언어에도 지금까지 내가 읽고 번역한 무수한 글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 번역이라는 문구와 함께 에밀리 윌슨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편에는 의심의 눈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번역했다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이미 수십 편의 번역이 있는데 왜 또 다른 번역이 필요한가? 여자의 번역이라서 의미가 있다는 말은 곧 번역가가 투명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고 원본에 함부로 개입해 훼손했다는 뜻이 아닌가? 요즘 말로 하면 호메로스에 ‘페미 묻힌’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위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윌슨이 옮긴이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윌슨은 원문 충실성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오히려 현대의 편견이나 관념이 글에 옮겨지는 것을 경계했다. 오뒷세우스에게 장려하고 과장된 수사를 붙이고 페넬로페의 손에 필터를 먹이고 여자 노예들에게 ‘창녀’라는 오명을 덧씌운 것은 남자 번역가들이다.



에밀리 윌슨의 『오뒷세이아』 번역은 원본의 틈새에 파고들어 은폐된 모순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권위 있는 텍스트에 미세한 균열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원적인 서사로 생각한 것에도, 호메로스의 위대한 작품에도 균열이 있고 여러 목소리가 섞여 있으며 순수한 하나의 목소리란 신화에 불과함을 여성의 번역이 드러낸다. 반들반들 다듬어진 표면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균열, 삶의 고통, 노예들의 비명,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돌렸던 것들이, 그럴듯하게 구성된 신화를 치웠을 때 비로소 보인다. 번역이 원문의 틈새에 깃들어 있던 목소리를 끌어낸다.



바벨탑 때문에 같은 것을 말하는 수만 가지 다른 방식이 생겼다. 우리는 그전으로 거슬러 가서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게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말들의 부딪힘과 어울림, 언어를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 날마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언어의 신비한 변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버리고 싶은가. 살아 있는 풍부하고 섬세한 언어 없이 문화가 발전할 수 있을까.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가 있다. 단테가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속어가 아니라 공용어이지만 죽은 언어인 라틴어로 글을 썼다면 『신곡』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우리가 쓰는 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평범해지는 쪽이 아니라 더 탁월해지는 쪽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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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별사
정길연 지음 / 파람북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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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별사

저자 정길연

파람북

2025-01-17

소설 > 역사소설






- 시대를 앞선 사상가의 마지막 순간

- 끝까지 꺾이지 않은 연암의 신념과 기록






성큼 다가온 봄에 잘 어울리는 소설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책은 연암 박지원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려낸 장편소설입니다.


『안의, 별사』는 안의에서 이별하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인간의 고뇌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상가로서의 연암이 아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연암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맡아두었던 물건을 돌려보내오, 밤마다 내 그림자의 좋은 짝이었소. 내 이미 목을 빼고 돌아갈 날 기다린 지 오래고, 아침 일도 저녁이면 하마 옛일이니, 떠나는 이 순간도 내일이면 아마득한 옛날로 여길 것이오, 부디 자중자애하오.


때아닌 진눈깨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오후 들어 바로 바뀌었습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곡인 양 빗줄기는 가늘고도 검질깁니다. 지난해 7월 중순 이후 여러 달 내리 가물었지요. 섣달 끝ㅈ락에 와서야 홀연히 뿌리기 시작한 비가 곡우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는군요. 빠끔한 날 드물어 꽃도 풀도 나무도 땅속에서부터 감감합니다.

따로 기별은 아니 주시려나 봅니다.


정작 더 난감하고 우스운 일은 홍섬이 돌아간 뒤에 일어났어요. 집안일 하는 아이가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하였지요. 맹랑하게 울음판 벌이는 고것이 내심 부럽더군요. 제가 해볼 도리라고는 가야금 끌어당겨 가만가만 열두 줄 쓸어나 보는 정도이지요. 상중이라 악기는 그저 나무통에 불과합니다.

나리를 마주 뵌 것이 작년 가을 외할아버지를 여의었을 때가 마지막이었군요. 몸소 상청을 찾아주시니 비통함 속에서도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요.


밤사이, 안인 듯 밖인 듯 경계가 흐릿하여 주저앉았다 일어섰다 오락가락하였지요. 묘연히 발돋움하여 관아 주변을 몇 바퀴째 돌다가, 아직 얼음 빠지지 않은 뒷산 대숲에 들어가 내아 기와지붕을 내려다보았어요. 울컥하여 무어라고 무어라고 혀 밑에 감춰둔 말을 외쳐보는데, 대나무 꼭대기에 매복 중이던 살바람이 되다 만 소리를 채가고 말았답니다. 몽중방황이런가요. 온 마을의 길들을 둥둥 떠서 헤매는 헛것이 진짜 저인 것 같았습니다. 아니, 진짜 저였습니다.


가도 가도 흙먼지와 아지랑이뿐인 요동 벌판을 내 눈으로 보았다. 산해관까지 일천이백 리. 하늘 끝과 땅 끝이 마치 아교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했다. 요동에서 나는 갓 태어난 아이마냥 한바탕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경자更子년(1780) 여름의 일이었다. 조선 땅에 돌아온 뒤부터 조랑말 고삐를 잡고 맬 때마다 매양 감질이 났다. 부리는 말은 노쇠해 눈곱이 꼈고, 나서는 길마다 비좁고 굽었다. 말 잔등에 바짝 엎드린 채 비나 구름 사이를 휙휙 지나치던 경자년의 일이, 혹 장님이 꿈속에서 보았던 헛것만 같았다.


북경을 다녀온 사신이라면 연행기를 쓰는 것이 관행이 된 지 오래다. 김창업이나 홍대용, 박제가 정도를 제외하면 판에 박은 듯 기술하는 내용이 비슷하다. 나는 연경에서 열하로, 다시 연경으로 정신없이 내달리며 보았던 일들을 시시콜콜히 풀어놓았다. 중국의 노래나 풍습도 사실은 나라의 치란에 관련된 것들이니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다. 성곽과 궁실 구조라든지, 농사짓고 목축하는 일과라든지, 도자기 굽는 가마와 쇠 다루는 대장간의 일상도 하찮다 하여 빠트리지 않았다. 그 일체에서 이용후생의 길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용감한 과부는 단순히 개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절개를 인정받기에 부족하다 여겨 마지막 선택을 한다. 왕왕 한낮의 촛불처럼 무의미한 여생을 스스로 끝내버리고 남편을 따라 죽기를 비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여 물에 빠져 죽거나, 불 속에 뛰어들어 죽거나, 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극락에 들듯이 한다.

명분은 아름다우나, 목숨을 가벼이 다룸이 너무 지나치다. 나라에서도 붉은 정문을 내려 칭송하니, 방방곡곡에서 비바람에 삭아 빠개질 문짝과 꽃 같은 목숨을 맞바꾸는 결단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과부의 죽음을 장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작은아버지 소리 듣게 된 둘째 종간은 한술 더 떠 '골상이 비범하다'고 써놓았더라. 이렇게들 요량이 없어서야.

멀리서 어린놈을 궁금쩍어 하는 할아비를 위해서라도 생김생김을 생긴 대로 구체적으로 일러주면 좀 좋을까.

가령, 이마가 넓다든지, 툭 튀어 나왔다든지, 모가 졌다든지, 정수리가 평평하다든지, 또는 둥글다든지. 천리 밖에 나와 앉아서도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말이다.

미덥지 않음이 다른 데서도 드러난다.


땅덩어리가 참말 둥글다면 이 강물도 공처럼 굴러 굴러 한곳에 가 모이지 않을까요. 엉터리없는 말인 줄 알지만, 그렇게 믿으면 그런 것이지요.

음양의 인연만 인연이겠는지요. 옷깃 스친 인연이 이 강모래처럼 쌓이고 쌓여 저마다 환희와 슬픔과 회한을 빚었겠지요.

그러니 무연재, 인연 없는 집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 아닐는지요.


저 글씨들처럼 이전의 저를 지우려 합니다. 비웠으니, 비었으니, 다시금 새로이 채우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지요.

그리하려고요. 모쪼록 그리하려고요.





연암의 생애를 한 편의 책으로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마냥 순탄치 못했습니다.

가족들을 줄줄이 떠나 보낸 아픔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날카로운 필력과 개혁 정신은 여전히 빛나지만 그의 곁을 둘러싼 현실은 점점 더 차갑게 변해가죠.

백성들의 시름은 깊어져 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조정은 그를 지치게 만듭니다.

벗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조정의 권력 싸움은 변할 것 없이 여전해, 점점 나이 들수록 세상의 변화가 더욱 버겁게만 느껴지게 됩니다.

젊은 날 누구보다도 앞서 나가고자 했던 그였지만 훗날 그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과 사상을 되짚습니다.

즉 그의 마지막 여정은 단순한 퇴보가 아닌, 깊은 성찰과 깨달음의 길이었습니다.


문득 연암의 젊은 시절과 노년 시절의 두 모습이 그려집니다.

젊은 시절의 연암은 날카롭고 예리한 인물이었다면, 노년 시절의 연암은 권력과 명예 따위에 지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선 채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였습니다.

여전히 책을 놓치지 않았으며, 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변화를 갈망하며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귀감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연암의 내면에 자리한 깊은 외로움과 삶에 대한 통찰이었습니다.

연암의 우울함은 그의 오랜 지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도 우울함을 떨쳐내보고자 책과 붓을 놓지 못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연암 박지원의 마지막을 기록한 소설은 아닙니다.

당대의 사상가로서 시대를 앞서갔지만 그의 사상과 가치관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니깐요.

그럼에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나홀로 그 마지막이 쓸쓸할지언정, 그 과정에서 묻어나는 삶의 무게와 사색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지켜온 가치와 신념을 되새기는 과정인 것이지요.

그래서일까요? 그가 글을 통해 시대를 향해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의 고뇌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연암의 삶을 다시금 되새기고 싶은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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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

저자 백수린

문학과지성사

2025-02-28

소설 > 한국소설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강사가 말했다. 강의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비가 와 결석생이 생긴 탓도 있었지만 원래 수강생이 적은 수업이었다.

강의실엔 그녀까지 여섯 명이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모두 강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녀는 마침내 찾아온 평화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평생 동안 장사를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그녀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아늑했고, 그건 평생교육원에서 돌아와 식탁 의자에 앉은 채 오후의 햇살이 거실 마룻바닥 위에 넓게 퍼져 있는 걸 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하고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 햇빛 사이로 지난 몇 달간 그녀가 정성껏 가꾼 나리꽃의 꽃망울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꽃이 피었네."



그녀는 길을 찾기 위해 물풀을 헤치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기억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빼꼼 그녀를 바라보던 앵무새, 어깨에 올려놓으면 가만히 앉아 그녀와 같이 연속극을 보며 그녀의 목에 보드라운 부리를 비비던 앵무새, 화초에 물을 주기 위해 그녀가 양동이 가득 물을 담아 뒤뚱뒤뚱 걸어가면 그 뒤를 총총총, 발소리를 내며 따라오던 작고 작은 새가 아직 그녀에게 있던 시절로. 사람들은 알까. 잠에 들면 앵무새의 그 조그마한 발이 더 따뜻해진다는 걸.



그녀의 이목구비나 실루엣, 목소리의 높낮이와 이름 같은 건 세월 속에 지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 일렁이던 특별한 빛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빛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가 당신을 황홀한 듯 바라볼 때 당신의 눈동자에 비치는 그 빛. 터무니없는 열망과 불안, 기대가 뒤섞인. 지금까지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건, 그녀 옆에서 개리를 바라보던 언니의 얼굴에서도 그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니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걸으면서 언니는 큰이모를 위해 보이는 풍경을 묘사해주곤 했다고. "엄마와 여길 같이 걸었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애를 썼겠지. 사방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온통 부드러운 흰빛이라고. 눈 위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은 아주 연한 노란색이라고." 그렇게 묘사를 하고 나면 큰이모는 "이젠 내 차례야" 하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그리고 큰이모는 시각을 잃은 후 얻게 된 예민한 다른 감각들을 활용해 큰이모가 느끼는 풍경을 언니에게 묘사해주었다. 바람이 어제보다 부드럽고 가볍구나. 눈 때문인지 사방에서 지난여름 우리가 쪼개 먹었던 수박향이 나는구나. 까치 소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들리는구나.

"엄마가 묘사해주던 그 세계 역시 정말로 아름다웠어."



주미가 침묵을 깨고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풍경이 잃었던 색깔을 되찾는 것을 보며 일출을 보지 못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예전엔 그런 가능성에 대해 누군가가 말하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그 비둘기가 이틀간의 몸부림 끝에 자기가 떨어진 그 좁은 통로로 탈출에 성공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믿는다고. 그 비둘기가 여러 시도 끝에 정말로 날아갔을 수도 있다고.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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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지향성

저자 존 R. 마일스

오픈도어북스

2025-02-14

자기계발 > 성공 > 성공학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짐 콜린스에 따르면 위대한 기업은 거의 없으며, 진정으로 영감을 주는 리더는 더 적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편 캐롤 드웩은 《마인드셋》으로 많은 사람이 고정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탐구하였다. 그런가 하면 케이티 밀크먼의 《슈퍼해빗》에서는 행동 변화를 위해 평생의 목표를 지향하는 삶에 수반되는 계획적인 노력보다 현실에 안주하기가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왜 현실에 안주하기를 택할까? 이에 주변에서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다."라고 말하며 만족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자. 실제로 이처럼 평범한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다수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인생의 길을 걷는다.


| 출생 - 초등학교 졸업 - 중학교 졸업 - 고등학교 졸업 - 대학 또는 직업학교 입학 - 안정적인 직장 구하기 - 내 집 마련 - 가정 이루기 - 주택 담보 대출 상환 - 은퇴 - 사망 |


이상의 인생 여정은 삶에서 이루는 것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기는 하다. …… 즉 꿈을 추구하지 않는 삶이란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르게 행동하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를 발굴하고 활용하여 목적의식과 기쁨, 의미 있는 영향력으로 가득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



재창조의 과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커다란 위협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진정한 열망을 추구하더라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학위는 물론이고 커리어와 재정 능력까지 위협받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현재 하는 일에서 마음이 이미 떠난 상태라면, 성장을 좇는다는 생각은 곧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가슴을 뛰게 하는 짜릿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려 한다. 마치 지난 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기듯 사건이 변화하는 순간을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재창조의 순간에 우리는 독특한 동기에 이끌려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일 기회를 얻는다.



영향력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모기와 같이 종종 잠재의식에 숨어 우리의 행동을 은밀하게 조종한다. 그러나 그 존재감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영향력이란 단순한 순응이나 모방의 문제가 아니다.



우주로 떠나는 용감한 이들의 여정은 곧 목숨을 건 모험에 발을 내딛는 것과도 같다. 어쩌면 우주로 발사되는 순간에는 공포감과 함께 짜릿한 흥분감을 느끼겠지만, 궤도에 진입한 뒤에는 수많은 우주 비행사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외감은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를 ‘조망 효과(overview effect)’라고 한다.



원대한 꿈을 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자기가 설정해 놓은 목표에 압도되기 쉽다. 수많은 이에게 앞길이 막막해 보이는 이유는 현재에 집중하지 않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표와 열망에 맞는 기회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탁월함을 성취할 다른 일에 ‘예’라고 말하는 셈이다. 과중한 부담을 떠안고 탈진해 그저 그런 결과만 내는 것은 꿈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특별히 해당하는 유형은 자기 인식이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혼자 있을 때는 어떠한 가면도 쓰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을 나눌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오늘날처럼 상호 연결된 세상에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하는 마이크로매니지먼트(micromanagement)는 영향력 있는 리더로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물론 과거의 리더십은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세부적으로 감독하는 능력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빠른 변화로 연결성을 중요시하는 요즘은 환경을 전체적으로 조율하고 개별 요소를 일일이 관리하는 대신 집단 전체를 이끄는 데 초점이 맞춰진 리더십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모든 요소를 사사건건 통제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협력을 통해 발전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동안 자기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상사나 동료, 또는 과도한 양의 일을 떠안고 있다가 결국 최악의 상황에 책임을 회피하는 동료를 겪어 왔다. 누구나 한 번쯤 그 사례를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한 유형의 사람은 자신이 보여 주고자 하는 이미지를 깨뜨리는 것을 실패와 다름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통제권을 내려놓지 못한다.



삶에 몰입하지 못한 채 지향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즉흥적 몰입(spontaneous engagement)이다. 이는 한마디로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자동 반복 루프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전반적인 포부에 점차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는 ‘나무를 심기 가장 좋은 시기는 20년 전이고, 두 번째로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처럼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행동에 나서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이에 야망과 행동, 열망의 연금술이 당신을 보다 지향적이고 충만한 삶으로 이끌 것이다.



성공에 대한 추구는 끝없는 인정 욕구와 얽히며, 자기애는 외부의 성취라는 기반 위에 불안정하게 자리 잡는다. 그러나 자기애와 성공에 대한 거래적인 접근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는 우리를 진정한 성취와 자기 수용에서 멀어지게 하는 잘못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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