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라진 뒤에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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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작가의 [그들이 사라진 뒤에]를 읽었다. 몇 명 되지 않는 SNS의 결혼한 지인들은 온통 아이들의 사진으로 도배를 한다. 그들의 자녀들을 한 번도 직접 못 적이 없지만 매일, 며칠 간격으로 업데이트 되는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보노라면 길거리에서 그 아이들을 우연히 만나도 먼저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보기엔 그냥 평범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 같은데, 엄마 아빠의 눈에는 두 번 다시 없을 엄청난 이벤트로 보이는 것 같다. 마치 20대의 젊은이들이 온통 셀카로 자신의 얼굴을 찍어 남기다가 나이가 들수록 꽃과 나무 사진으로 가득한 핸드폰의 사진첩처럼, 아이의 행보 하나 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부모가 되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며칠전 버스를 기다리다가 엄마는 밑에서 아이는 엄마 무릎 정도 되는 높이의 길게 늘어진 경계석 위를 신나게 걷는 모습을 보았다. 행여나 아이가 떨어질까봐 신나하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안은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는 참 좋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사랑을 받는 아이들이었다. 엄마 아빠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때로는 아이한테 너무 큰 기대와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란 염려가 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안정된 곳에서 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들 중에서도 버릇 없고 자기 멋대로인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그런 아이들을 만나 조금만 마음을 열고 기다려주면 친구가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작은 사탕 하나로도, 라면 한 그릇이나 햄버거 하나로도 아이들은 쉽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프고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았다. 잊을만 하면 뉴스를 통해 아동학대로 숨진 아이들의 소식을 듣곤 한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가도 자꾸 신경이 쓰일 것 같아 채널을 돌리고 만다. 소설 속에 나온 목격자 ‘김 모 씨’나 ‘최 모 씨’처럼 의심스럽고 안타까우면서도 내 일이 아니니까 괜히 간섭해봐야 피곤해질까 뻔하니까 라는 나태한 생각으로 이 세상 어디선가 고통 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을 방치하는데 일조해 왔다. 자책하고 죄책감을 가져봐야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뉴스를 보며 쯧쯧 혀를 차는 정도의 연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핑계를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다. 


소설 속의 아이들의 연대를 유심히 지켜본 임산부 ‘신수연’과 편의점 알바생 ‘오영준’은 용기 있는 선택과 행동으로 아이들을 죽음의 늪에서 꺼내준다. 우리가 김 모 씨나 최 모 씨 처럼 익명의 존재자로 남지 않고 신수연과 오영준 처럼 이름을 갖고 불리기 위해서는 어쩌면 그들의 행동은 용기있는 선택이 아니라 당위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이름으로 갖고 존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음을 그 작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울림을 주고 있다. 그래서 더 없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나직이 읊어본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해결이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았다. 저 집에서 일어난 일을 누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바로 옆인데, 여자의 집과 똑같은 구조로 생긴 집인데,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게. 그저 벽 하나에 가려졌을 뿐인데, 그 끔찍한 일이 벌어지도록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정말 몰랐을까.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른 물음에 여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정말, 몰랐던가.(121)”


“이런 일이 터지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분노하고 서명도 하잖아요. 그런데 오래 못 가요. 사람들은 불편한 건 빨리 잊으려고 하거든요. 왜냐면 자기도 힘이 드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죽어가는 남의 집 아이보다 당장 내 아이 교육 문제가 더 시급하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은 잘 알거든요. 투표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그래서 아동 학대 문제는 계속 뒤로 밀려나고 결국 잊혀요. 아이들은 계속 죽고요.(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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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 곱빼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띵 시리즈 14
박찬일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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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짜장면: 곱빼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를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14번째 책이다. 띵 시리즈는 가볍고 얇아 어딘가 이동하며 읽기가 편하다. 벽돌책들은 손에 들고 보다가 무거워서 몇 번이나 바꿔쥐다가 그만 집중력이 흐트려지곤 하는데 비해, 띵 시리즈는 한 손으로 들고 보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히나 먹는 음식에 대한 내용이다보니 읽는 동안 허기가 밀려오곤 한다. 짜장면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이번 책을 읽다보니 짜장면이 너무나도 먹고 싶어서 바로 가까운 중국집에 갔다. 짜장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는 혹 차이니즈 레스토랑 신드롬 같은 증세가 있다면 모를까 애 어른 할 것 없이 짜장면은 국민 음식의 반열에 올라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짜장면을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해서 잘 먹지 않았다. 중식당에 가도 주로 볶음밥 종류의 음식을 먹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책이 미리 준비해준 침과 식욕 때문인지 정말 오랜만에 한 그릇을 다 비우고도 속이 편안했다. 


짜장면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원래 노래 가사가 아니라 개사한 노래인데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음에도 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홍수철 님의 '철없던 사랑'을 '철없던 짜장'으로 개사한 노래이다. '철없는 마음으로 짜장면 사먹었지. 맛도 모르는 채 값도 모르는 채 불타는 가슴으로 짜장면 사먹었지. 영원토록 향기로운 우리의 짜장이여. 짬뽕은 싫어 오징어 꼴뚜기가 너무 많아. 그리워져요. 철없던 우리 짜장이 내 사랑 그대 그대여 700원만 꿔주세요. 먹고 싶어요. 철없던 짜장이" 누가 개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보니 이 노래가 1985년에 나왔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짜장면이 한 그릇에 700원 쯤 했나보다. 요즘은 중식당이 있는 위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 것 같다. 또 짜장면에 무엇을 넣고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그릇에 5천원에서 만 5천원까지도 다른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저자가 안타까워하듯이 짜장면은 중요한 날 먹던 대접받던 음식에서 그냥 한 끼 대충 때우는 음식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다. 졸업식이나 축하할 날이 있던 날 먹는 짜장면이나 이사하고 나서 먼지가 풀풀 날리는 집에서 대충 신문지를 깔고 급하게 시켜 먹던 짜장면과 당구장에서 배가 고파 허겁지겁 한 두 젓가락 뺏어먹던 짜장면 모두 소중한 추억의 한 장면을 차지하고 있기에 지금처럼 하대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짜장면이 중식당에서 파는데도 불구하고 원래 중국 음식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중국 본토에 가면 한국식 짜장면을 파는 곳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저자의 짜장면 추적을 통해서 중국에도 원래 짜장면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화교들이 우리나라에서 장사를 하면서 원래의 짜장면이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짜장면의 맛으로 변화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은 춘장의 공업화와 면을 뽑는 기술이 수타에서 기계로 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북방과 남방은 기후가 완전히 다르기에 북방의 짜장면과 남방의 짜장면이 다를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다른 짜장면의 맛이 우리나라에 정착하며 한국식 짜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대부분 그 나라의 수도에 차이나 타운이 형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지금의 소공동 중국 대사관 근처에 형성되어 있던 화교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짱깨라는 혐오적인 단어가 탄생된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장난 같은 말들이 때론 누군가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수도 있고 결국은 부메랑처럼 우리 자신에게 돌아와 조센진과 같은 비하의 말이 비수처럼 우리 가슴에 박힐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성과 더불어 짜장면을 먹으면 왜 속이 더부룩해질까 저급한 밀가루를 썼기 때문일까 의심해왔는데, 바로 면을 더욱 쫀득하게 만드는 소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짜장면의 면 색깔이 약간 노란 빛을 띠는 이유는 소다를 만나서 그렇게 때문이며 "소다 많이 들어간 짜장면을 먹으면 위산이 줄어들어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더부룩한 기분이 들 수 있다(148)"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밀가루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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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선의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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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작가의 [최소한의 선의]를 읽었다. [개인주의자 선언]과 [쾌락 독서]를 통해서 판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실히 무너뜨렸다면 이번 책은 본연의 전공을 맛깔나고 저자의 색깔을 확실히 입혀 어렵게만 느껴지는 법을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군의 지인 한 명만 있으면 사회생활이나 여타의 상황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병원이든 법원이든 전화로 부탁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 지 모를 때 든든한 보험을 들어 놓은 것처럼 안심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나 요즘처럼 법을 처리하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고 당연히 과거보다 훨씬 더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돈 있고 힘 있는 이들이 법을 더 잘 이용한다는 불신은 좀처럼 회복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법을 전공하거나 법 관련 일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은 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막상 법이 거론되는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 없이도 살 정도의 선량함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사실 법이란 어떤 윤리적인 인간의 행동에 대한 기준에서부터 출발하여 저자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법이란 사람들 사이의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선’인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선’(9)”을 뜻한다.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한 이것만큼은 어기거나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약속이기도 하다. 각양각색의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서로가 다른 성향을 갖고 있음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하도록 정한 약속이기에 때로는 불만과 수용이 힘들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약속이다. 하지만 막상 그 애매모호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한 어떤 법 조문이 나의 상황에 적용될 경우에 ‘최소한의 선’이라는 이름에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법을 잘 아는 변호사를 통해서 우리의 억울함을 해소해달라고 청하거나 받을 벌을 조금이라도 상쇄시키기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세세한 법률 조항이 아닌 헌법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함이라는 정의가 그냥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겪지 못했던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에 내가 공짜로 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때아닌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노예제와 노비제가 폐지되고 성평등에 대한 당연한 진리가 우리 사회의 문화 속에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떤 한 사람의 성격이 어떻든간에, 재물을 얼마나 가졌든간에, 출생성분이 어떻든간에 인간은 모두가 동일한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당연한 것임에도 존엄함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목숨을 건다. 나와 동일한 존엄함을 가진 누군가가 내 것을 빼앗아 갈까봐 말이다. 그 존엄함을 인정하고 누리기 위해 우리가 가진 자유를 언제든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최소한의 선’을 누릴 공공질서를 위협한다면 나의 자유에는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다는 단순한 논리에도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과연 이 시대에 정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정의라는 것도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염세적인 시선이 때로는 극단적 행동도 불사하게 만든다. 


우리가 속한 어느 단체나 공동체에도 자신의 개인적인 시선 속에서 불의함의 존재한다. 최종결정권자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고 그런 불의한 선택에 동조하는 이들의 시류에 또한 분노가 넘쳐흐른다. 그럼에도 끈임없이 비판하고 질시하고 화를 내는 감정이 지속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의 글 속에서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답을 얻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관종’이다. 관심받고 싶어하고, 남들에게 관심도 많다. 인간은 탄수화물 중독 이상으로 인간 중독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탄수화물보다도 인간이 더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124)” 


우리가 인간 중독으로 어차피 이 사회에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마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전쟁이나 대량학살, 난민촌에서나 비로서 찾게 되는 가치가 아니다. 전염병과 싸우는 게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성소수자가 주로 드나드는 클럽에 누가 어느 날 들렀는지, 누가 언제 어느 모텔에 들렀는지까지 알 수 있도록 개개인의 동선이 공개되는 상황이 아무 문제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마음.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운동화 깔창을 대신 사용하고 있다는 일을 알게 되고는 앞뒤 따질 겨를도 없이 ‘아유 어째! 그래선 안 되지!’하는 소리가 터져나오게 되는 마음. 학생들에게 점심 한끼라도 무료로 먹을 수 있게 해주되, 이왕이면 사춘기 아이들의 자존감까지 배려해서 누구든 돈을 내고 먹고 누구든 무료로 먹는지 알 수 없도록 제도를 만들어보자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사회를 만든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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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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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읽었다. 몇년 전 간호학과 학생들에게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다가 예전에는 각자 살던 집에서 초상을 치뤘다는 말을 하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표정이라면 차라리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였을텐데, 학생들은 마치 내가 농담이라고 하는 듯 별로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상세히 불과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돌아가신 분 집 앞에 ‘근조’라고 쓰인 주광색 등을 달아놓았으며,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집 병풍 뒤에 모셔놓고 향을 피우며 유가족이 추모하러 오신 분을 대접하며 삼일 밤낮 장례 기간을 보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제서야 자기들이 태어날 즈음까지도 유지되던 장례문화를 조금은 뜨악한 표정으로 떠올려 보려는 듯 했다. 우리나라의 변화속도는 그야말로 LTE 수준처럼 너무나도 급박하게 달라져 10여년의 차이만 나도 여러면에서 소통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생겨나곤 한다. 특히나 요즘은 집에서 돌아가실 경우에는 사망 판정에 대한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경찰이 오고 나서야 장례를 치룰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대부분의 삶을 병원에서 마감하다보니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오히려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수없이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병자 방문을 해도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에 갇힌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입에서는 그럴듯한 위로의 말이나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전하고 싶은데, 막상 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입이 꾹 다물어지고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묵묵히 눈빛과 교환하고 나올 때가 많았다. 작년에 연수원에서 만난 신부님들과 회식을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아마도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화제는 당연히 부모님의 건강에 대한 염려로 이어졌고, 50대 중반인 어느 신부님이 너무나도 아이같이, 너무나도 안쓰럽게 ‘난 엄마가 돌아가시면 진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보다 한참 선배님이시고 삶의 경험이나 사제로서의 견고함을 갖춘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그런 감정들을 애써 담담히 견뎌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솔직히 툭 내뱉은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삶의 질’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먹고 사는 상태가 예전보다 좋아지고 윤택해졌음을 뜻한다. 그래서 딱히 부정적인 느낌도 없고 당연히 사람들은 삶의 질이 나아지기를 고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명윤리의 학문적 영역에서 ‘삶의 질’이라는 말이 적용될 때에는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게 된다. 누군가의 ‘삶의 질’을 위해서 나와 동일한 인격적 존재인 타인의 사용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생명 연장을 위한 극단적인 욕구는 장기 이식을 위한 생명을 가진 존재에 대한 비윤리적인 실험을 용인하게 된다. 과거에 비해 엄청난 의료적 혜택을 받고 있음은 명확하지만, 평균 수명이 두배로 늘어난 현 시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100년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뒷좌석에서 택시비를 내고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백미러 끝자락에 스쳐 지나갔다. 아픈 데 없이 건강한 사십대 중반의 남자였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의사로서 나름 인정받고 있으며 교수라는 안정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외적인 조건을 놓고 보자면 운전석의 그보다 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순수하게 행복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행복이 어떤 절대값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와 나의 간극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그 사실이 조금 더 나를 슬프게 했다. 그것은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근원적인 부분이었으므로. 

인생 리셋이라.

그와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전자제품에 리셋 버튼이 있듯이 가끔 우리 인생에도 리셋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인생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이 버튼을 누르고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주 잘살수 있을 것만 같은데.

물론 어디까지나 꿈같은 이야기다. 지나온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리셋 버튼이란 건 없다. 결국은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는 이야기다. 그 같은 변화가, 삶을 대하는 깊이와 여유 있는 태도가. 그럼에도 나 자신을 다독였다. 아직은 내가 그 같은 리셋 버튼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라고. 언젠가는 나 역시 그 같은 순간을, 무엇인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95-96)”


“남들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내 몫의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같은 슬픔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 그들의 잣대로 규정짓고 재단하려 할 때 슬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되곤 한다.(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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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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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아 작가의 [밤이여 오라]를 읽었다. 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이다. 다뉴브, 블타바, 도나우 이름은 다른지만 모두 같은 강을 가리킨다. 같은 강줄기가 흘러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민족들이 부른 이름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프라하의 카를교 위를 걸으며 이 강 이름이 블타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재 개그처럼 ‘불타봐’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흐르는 강의 이름이 다뉴브이고 블타바와 같은 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아 정말 유럽은 큰 대륙으로 다 연결되어 있구나’라는 직관적인 깨달음이 다가왔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유럽의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남과 북이 분단된 나라라는 사실과 재미삼아 south or north? 농짓거리나 할 줄 알았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로 발칸 반도의 나라들을 상세히 알지 못했다. 이 책에 나온 인종청소라 칭하는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이 1995년에 일어났다고 하는데, 당시에 그런 뉴스를 본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보니 누굴 욕할 처지가 아닌듯 싶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여전히 이들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지도를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니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어떤 비극적인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 아님 부끄러운 일일까? 


이 소설의 주인공 변이숙에서 조한나라는 번역가로 활동하는 주인공은 마르코라는 사람의 책을 번역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집에서 머물며 발칸 반도를 여행하게 된다. 마르코가 알려준 앞서 언급한 인종청소가 벌어진 지역들을 방문하며 한나는 자신과 마르부르크에서 만나 사랑했던 기표를 떠올리게 된다. 한나의 고향은 제주였지만 소설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아마도 한나의 어머니의 아버지가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미군정의 허락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상당수도 내륙의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나의 슬픈 역사는 서역 반대편에 마르코의 삶에서 재생되고 한나와 기표가 안기부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는 사건은 마르코와 나쟈가 모두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는 가해자의 쓸모없는 유산으로 인해 갈등을 빚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소설 속에서 그려낸 망상이 아니라 불과 얼마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지만, 사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군부 쿠데타로 고통받고 있는 미얀마는 언젠가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게 될 이야기를 전해줄 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만 들어야 하는 현실은 사뭇 인간이란 무엇인지? 결국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1차원적인 철학적 명제로 소급된다. 


“가늘게 숨소리를 내는 마르코 곁에서 세상은 고요했다. 테러는 이곳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쟈만 아니었다면, 마르코도 나도 파리의 테러 뉴스를 보면서 아침을 먹었을 것이다. 누군가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구나, 나는 거기 없으니 괜찮아. 값싼 동정과 연민을 보낸 후 각자의 일상을 살아갔을 것이다. 

사라예보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TV뉴스에서 세르비아군이 부코바르를 침략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을 때, 안락한 자신의 거실에서 그걸 보고 있던 사라예보의 평범한 시민들 대다수는, 아, 정말 끔찍한 일이야, 하고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예보는 그보다 더욱 참혹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했다. 

나는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사진 한 장을 기억했다.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듯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사람들이 언덕 위에 비치 의자 같은 걸 내놓고 앉아서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불꽃이 얼마나 뜨겁게 이글거리는지 캔맥주를 마시며 웃고 있는 사람들 얼굴이 번지르르했다. 그건 시리아에 포탄을 퍼붓는 장면이었고, 구경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SNS를 돌아다니는 사진에 붙여진 제목은 ‘나는 악마를 보았다’였다. 그러나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들만이 악마일까?(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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