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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평점 :
김범석 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읽었다. 몇년 전 간호학과 학생들에게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다가 예전에는 각자 살던 집에서 초상을 치뤘다는 말을 하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표정이라면 차라리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였을텐데, 학생들은 마치 내가 농담이라고 하는 듯 별로 괘념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상세히 불과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돌아가신 분 집 앞에 ‘근조’라고 쓰인 주광색 등을 달아놓았으며,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집 병풍 뒤에 모셔놓고 향을 피우며 유가족이 추모하러 오신 분을 대접하며 삼일 밤낮 장례 기간을 보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제서야 자기들이 태어날 즈음까지도 유지되던 장례문화를 조금은 뜨악한 표정으로 떠올려 보려는 듯 했다. 우리나라의 변화속도는 그야말로 LTE 수준처럼 너무나도 급박하게 달라져 10여년의 차이만 나도 여러면에서 소통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생겨나곤 한다. 특히나 요즘은 집에서 돌아가실 경우에는 사망 판정에 대한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경찰이 오고 나서야 장례를 치룰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대부분의 삶을 병원에서 마감하다보니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오히려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수없이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병자 방문을 해도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에 갇힌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입에서는 그럴듯한 위로의 말이나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전하고 싶은데, 막상 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입이 꾹 다물어지고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묵묵히 눈빛과 교환하고 나올 때가 많았다. 작년에 연수원에서 만난 신부님들과 회식을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아마도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화제는 당연히 부모님의 건강에 대한 염려로 이어졌고, 50대 중반인 어느 신부님이 너무나도 아이같이, 너무나도 안쓰럽게 ‘난 엄마가 돌아가시면 진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보다 한참 선배님이시고 삶의 경험이나 사제로서의 견고함을 갖춘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그런 감정들을 애써 담담히 견뎌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솔직히 툭 내뱉은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삶의 질’이라는 말이 쓰일 때는 먹고 사는 상태가 예전보다 좋아지고 윤택해졌음을 뜻한다. 그래서 딱히 부정적인 느낌도 없고 당연히 사람들은 삶의 질이 나아지기를 고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생명윤리의 학문적 영역에서 ‘삶의 질’이라는 말이 적용될 때에는 긍정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게 된다. 누군가의 ‘삶의 질’을 위해서 나와 동일한 인격적 존재인 타인의 사용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생명 연장을 위한 극단적인 욕구는 장기 이식을 위한 생명을 가진 존재에 대한 비윤리적인 실험을 용인하게 된다. 과거에 비해 엄청난 의료적 혜택을 받고 있음은 명확하지만, 평균 수명이 두배로 늘어난 현 시점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100년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뒷좌석에서 택시비를 내고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백미러 끝자락에 스쳐 지나갔다. 아픈 데 없이 건강한 사십대 중반의 남자였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의사로서 나름 인정받고 있으며 교수라는 안정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외적인 조건을 놓고 보자면 운전석의 그보다 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순수하게 행복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행복이 어떤 절대값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와 나의 간극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그 사실이 조금 더 나를 슬프게 했다. 그것은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근원적인 부분이었으므로.
인생 리셋이라.
그와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전자제품에 리셋 버튼이 있듯이 가끔 우리 인생에도 리셋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인생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이 버튼을 누르고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주 잘살수 있을 것만 같은데.
물론 어디까지나 꿈같은 이야기다. 지나온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리셋 버튼이란 건 없다. 결국은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는 이야기다. 그 같은 변화가, 삶을 대하는 깊이와 여유 있는 태도가. 그럼에도 나 자신을 다독였다. 아직은 내가 그 같은 리셋 버튼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라고. 언젠가는 나 역시 그 같은 순간을, 무엇인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95-96)”
“남들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내 몫의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 그 같은 슬픔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이 그들의 잣대로 규정짓고 재단하려 할 때 슬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슬픔이 되곤 한다.(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