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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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보편교양, 혼모노가 좋았다.

김기태의 보편교양은 다시 읽어도 좋았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워낙 기억에 남는 단편집이라 다시 한번 주변에 추천하고 싶음.

혼모노의 신이 떠난 무당 이야기가 참 뭐랄까 이상하게 와닿았는데,

이 수상작품집의 전반적 이야기가 위악, 위선에 대한 것이 많았기에
이게 과연 시대 정신의 일부일까 생각하게 된다.

- 이번에도 내가 쏜 화살을 찾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잃어버린 화살을 찾으려면 같은 방향으로 한 번 더 활을 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 짓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해 봐." - 10, 김멜라 , 이응 이응 

- 네가 왜 난리냐,라는 말을 듣고 주호는 그러게, 내가 왜 난리일까, 싶었다. 주호는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책임이 없는 걸까, 그 생각에 사로잡혔고 무슨 일을 대하든 습관처럼 이 질문을 마주했다. 점점 주호는 자신과 상관없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몸이 물속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인터넷 기사 댓글들은 책임자가 책임을 회피한다고 화내고 분노했다. 하지만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주호는 그 물음에 더 마음을 기울였다. 기울어진 마음은 점점 가라앉고 가라앉아서 주호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 85, 공형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 한 장면을 상상한다. 내가 모르는 당신이 아무도 모르는 밤에 나의 소설을 읽고, 나의 입력값을 초월하여 당신의 출력값을 내는 일. 이는 나의 성취이자 당신의 성취로, 두 사람이 각자의 특별함을 함께 얻는 순간이다. 하나의 특별함이 곧 다른 하나의 평범함을 전제한다면, 둘이 함께 특별해진다는 모순적 사태는 어떻게 발생할까. 어쩌면 그러한 모순만이 우리를 진부한 삶에서 잠깐이라도 이탈시킨다. 한 사람의 개별성을 증빙하는 것은 상품도 상패도 아니라 다른 한 사람이다. 우리가 이미 사랑이나 우정 같은 이름을 붙이고 있는 이 호혜적 관계 속에서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이분법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우연한 교류를 설명하려면, 두 사람 사이에 두루 미치고 통하는 무엇을 상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차는 있을지언정 우리에게 공평히 깃드는 무엇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사랑과 우정과 문학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내게 소설을 나누는 일은 나의 개별성과 우리의 보편성을 동시에 탐색하는, 가장 덜 기만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맞춤형 개성을 구매하라고 재촉하는 이 세계에 잠식되고 싶지 않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된 저 세계로 투신하기에는 이르다. 둘 사이에서 나는 일단 문학에 머물러보기로 했다. 당신도 그곳에 계심을 믿는다. - 김기태, 작가 노트 중

2025. feb.

#제15회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 #2024 #김멜라 #공현진 #김기태 #김남숙 #김지연 #성해나 #전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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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1
황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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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동 직전 >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빨리 자랐고
무모한 친절을 멈추지 못했다

단 한 가지 결말을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해왔다
똑같은 모양에 머무르지 못하고 매 순간 무너졌다

한 번도 태어나 본 적 없는 자식이 나에게
그것이 최선이라며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구사했지만

나는 함부로 칼을 사용하고
안과 밖을 뒤섞고 싶어졌다

어떤 사람이 되기 전에 미리
어떤 사람이 되어두려고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독보적 유기체가 되어보려고

확인하고 싶은 건
내가 끝난 뒤에도 남는 끝이었다

눈을 좋아한다고 겨울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 않나
산책을 즐기지만 발걸음에 능숙한 것은 아니듯이

유기체가 가진 일직선의 힘과
되돌릴 수 없는 길의 구조
이미 만들어진 집과
저절로 도착하게 되는 집 사이에서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무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했다
한 번 정도는 확실한 것을 붙잡고
흔들어보고 싶었다

출발하지 못하는 차들이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댈 때면
가장 큰 경적을 울리는 차를 향해
왜 달려들지 않겠나

꽉 쥔 주먹으로 차창을 깨는
구체적 사건을 저지르고
피범벅 손에 팡파르처럼
왜 경적을 울리지 않겠나

어쩌면 나는
이 한 장면을 위해 급조되었는지 모른다

살가죽이 째지고
뼈가 부서지는 타격감을 위해서라면

모든 호흡이 매도당하고 낭비되는
쓸쓸함이야 얼마든지
(전문)

첫 장의 첫 시를 읽고.. 바로 한 눈에 반했다.
아무래도 나는 선동 잘 되는 사람인 듯하다.

-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 락앤락의 새로운 용기와 신흥 자본가의 출현 그리고 세계의 밖 중

- 살의를 잃어버리고 나는 오래된 사과처럼
더 이상 단단하고 아삭아삭할 일이 없어졌다 - 어떤 용서에게는 잔인한 일 중

- 머리 한 귀퉁이가 터진 채
세계 속으로 조금씩 개방된다
기억과 비명과 정서가
하나의 소용돌이로 휘말린다 - 베드타임에 듣기엔 부담스러운 동화 중

- 사람들이 왜 자꾸 이런 시를 쓰냐고 물을 때마다
나를 잊어버리지 못해 두려웠다고 대답했지만
나의 기억이 나에 관한 것인지 확실할 수 없었다 - 내가 없어지는 기분 중

< 꽃의 용기 >
바람을 따라 굽어지는 길

아무 질문도 소용없거나
모든 대답이 흩어지는 곳

흔드는 것과 흔들리는 것만 남았다

이제는 대답을 쏟아내야 할 차례
수십 년 봄과 함께 초록을 관람한 끝에

모르는 채로 알고 있던 해답을
결정타처럼 스스로에게 날리고

난데없이 쓰러져야 할 때
꽃은 스스로 억울해 하는 법 없이
아름다움을 끝낼 줄 안다

서정을 경계하며 살아온 지 얼마인가

함부로 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는 아무 의미도 되지 못한 채

차라리 꽃이라도 될걸 그랬다

형형색색 지천으로
지천의 너머로

피어날 걸 그랬다
(전문)

모든 시가 좋았다.
날렵하게 휘두르는 펀치 같은 충격이 매 편 존재한다.

좋아하는 시인의 목록에 올렸다.

2024. dec.

#가차없는나의촉법소녀 #황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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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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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생 작가. 보다 앞선 시기의 작가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밀란 쿤데라가 연상되는 작가다.

웨이터라는 직업으로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14세 소년의 성장사고, 그 정체성이 부딪힐만한 세상사, 인간사가 펼쳐진다.
다만 그 마주치는 현재의 윤리관으론 좀 고루하고 부적절하지만, 지난 시절의 낭만들이라고 포장하고 바라보자라는 합의를 종용하는 듯도 하다. 성 인식도 형편없고,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등의 저어하는 지점들이 있긴 하지만..... 화려하고 적당히 속되고, 적당히 귀족적인 풍토가 남아있는 마지막 시절의 단편들이라고 생각하면 어찌저찌 참아진달까.

체코 청년의 친독 행적이라는 건 우리로 치면 친일 같은 걸까? 이야기가 후반부에 커브를 튼다는 생각을 했다.

프라하 호텔에 도착하니 사장이 내 왼쪽 귀를 잡아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넌 이곳 견습 웨이터다. 그러니 명심해라!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복창한다!" 난 이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고 따라했다. 이번엔 사장이 내 오른쪽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또 명심해라! 넌 모든 걸 봐야 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 복창한다!" 난 얼떨떨한 채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들을 거란 말을 반복했다. 이렇게 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 7

바로 그다음 날부터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돈이 내게 라이스키로 가는 문만이 아니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문도 열어주었다. 입구에 있던 라이스키 부인이 이백 코루나를 공중에 집어던지는 내 손을 향해 입맞춤이라도 할 듯이 달려들던 모습이 생각났다. 처음엔 그녀가 몇 시인지 알고 싶어서 차고 있지도 않은 내 손목시계를 보려고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입맞춤은 황금 프라하 견습 웨이터인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바로 두 장의 백 코루나 지폐를 향한 것이었다. - 21

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몇 푼 안 되는 동전 몇 개를 위해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곧바로 알게 되었다. - 23

여기 호텔 티호타에서 알게 된 사실이 또 하나 있었다. 노동은 고귀하다, 라는 주장이 다름 아닌 우리 호텔에서 예쁜 아가씨들을 무릎에 앉히고 밤새 마시고 먹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바로 어린아이들처럼 행복할 수 있는 부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전에 나는 부자들이란 형편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소박한 오두막집과 작은 방들 그리고 시큼한 양배추와 감자, 이런 것이 사람들에게 행복과 평안을 주는 것이지 돈이 많은 것은 저주받은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가만보니 가난한 오두막집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하여 떠들어대는 이야기도 다름 아닌 우리 호텔 손님 같은 부자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 그때 옆에 앉은 다른 사람은 장작을 패고 있는 우리 호텔 포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저런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 하는 몽상에 잠겨 노동을 하고 있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자들은 노동을 찬양하긴 했지만 그들 스스로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노동을 해야한다면 슬퍼하며 불행해할 것이다. - 102

독일 명예-혈통 보호청이 내가 독일 혈통의 아리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도장을 힘 있게 찍어 결혼허가서를 건네주었다. 반면에 체코 애국자들은 같은 도장을 그렇게 꾹 눌러 사형에 처해졌다. - 206

기차역에서 플랫폼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스스로 낯선 사람인 것처럼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직업과 관심과 병을 가진 독일인들을 쳐다보았을 때처럼 -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셨고, 또한 영국 왕을 모셨던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 씨에게서 교육받았던 나는 그들의 차이를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예리한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니...... 체코 애국자들이 처형당하고 있는 동안 나치 의사들에게 독일 여자 체육 교사와 성교할 능력이 있는지 검사를 받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결혼식을 올리고 군가 <대열을 바싹 좁혀라!>를 부르고 있었고, 고향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독일 호텔에서 독일 군인들과 에스에스 대원들의 시중을 들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프라하로 더 이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아니 나 스스로 첫 번째 가로등에서 목을 매다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고, 나 자신에게 십 년형 이상을 언도했다. - 224

에스에스 대원들이 나를 그곳에 밀어 처넣으며 혐오스럽다는 듯이 "이 더러운 볼셰비키 종자!" 하고 소리쳤는데, 그 호칭이 내 귀에는 달콤한 음악처럼, 구애의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은 내가 프라하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입장권이자 차표가 될 것이며, 독일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게르만-아리안 여자와 성교할 능력이 있는지 성기 검사를 하며 헤프의 나치의사 앞에 서 있었던 내 인생의 얼룩을 없애줄 유일한 약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시계를 봤다는 이유로 얼굴이 다뭉그러진 것이 내게 정당성을 부여해 어느 날 조사를 받고 반나치 전사가 되어 다시 프라하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239

그런데도 나는 호텔 사장들에게서 굴욕감을 느꼈다. 여전히 나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과 같은 신분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능가하고 싶었는데...... - 265

종종 나는 도로를 정비하는 일을 내 인생의 길을 정비하는 것과 비교해보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한 편의 소설이며 내 인생이란 책의 열쇠는 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 328

술집에 앉아서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의 본질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 죽음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은 영원과 불멸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자신과 나누는 대화인 것이다. 이때 자신의 인생 여정의 무의미를 맛보며 어차피 지소되지 못할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바로 그것이 벌써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의 시작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맛보고 경험하는 일은 인간을 비통하게 만들지만 또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주기도 한다. - 331

2025. feb.

#영국왕을모셨지 #보후밀흐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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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시리즈 2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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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의 탐정 설자은의 활약 두 번째 이야기.

귀향길에 우연히 만난 소울메이트 목인곤과 지혜로운 동생 도은이 어슴푸레 팀 설자은을 결성한다.

왕의 공식적?인 칼인 흰 매가 된 설자은의 신분이 노출될까 싶은 아슬아슬함과 통쾌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느낌의 1권이었다면
두 번째 책은 조금 더 야만의 중세 느낌이랄까. 
당시의 신라인과 신라인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외부인들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데,
사회를 통합해야 하는 큰 과제에 당면한 신라. 그 안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정이 비정한 시대의 반영으로 보였다.

덕분에 1권보다 다소 무거워진 배경. 그게 오히려 시리즈로서의 무게감을 얻어 가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 "어떤 궤를 벗어난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의 마음에 어둠이 남네. 이제 와선 자네 앞에서 세상 불행을 다 끌어안은 척했던 게 부끄럽지만, 나는 조금 굶었던 것만으로 안쪽에 어둠이 고였어. 음식을 삼키면 뱃속에서 그 그림자도 함께 흔들리지. 자네 안에 그런 게 남지 않았을 리가 없어. 자네의 늘 웃는 얼굴은 일종의 마개인가보군."
"남의 얼굴을 마개라 하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흥, 지켜보기로 하지. 자네의 어둠이 어느 순간 새어나오는지."
그렇게 말한 자은이었지만 다음날 인곤의 방을 볕이 가장 잘 드는 방으로 바꿔주게 하였다. - 78

- 금성의 군더더기.
그것이 되고 싶지 않았다. 급히 몸집을 키워가는 금성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남는 입. 본 것이 지나치게 많은 눈. 그 어떤 외침에도 냉담한 귀. 웅크린 채 다음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지만 다음을 만나지 못하는 망가진 진흙 인형. 왕이 자은을 내치면, 자은은 그런 군더더기가 되고 만다. - 126

- 왕은 다른 이가 베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는 것까지가 자은의 소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베게 한 것은 왕의 힘이 자은을 통해 흐른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서였고, 자은도 그 뜻을 읽었기에 수행했다. - 155

- "어찌되었든 날을 더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입버릇 같은 혼잣말을 거듭했다. 누구나 더 이상 새날이 주어지지 않을 때까지 날을 더해가며 산다. 그뿐이다. 야단을 떨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고 경망스러운 자들이나 달리 굴 것이다. 일어난 일들, 일으킨 일들 모조리 품고 견디면 된다. 그럴 수 있다. 
말하다 보면 믿기는 날도 더러 있다. - 162

- 자은은 탑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것도 기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그다음의 이야기. - 327

2025. jan.

#설자은불꽃을쫓다 #정세랑 #설자은시리즈2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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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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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의 죽음.

배우자의 죽음과 딸의 투병이 연달아 이어지고 그 상실의 과정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내면이 서술된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며 등장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평온한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은 필사적으로 죽음을 부정한다는 강한 확신을 준다.

안 좋은 기억의 시기를 자세히 기억하기 어려운 증상을 나도 겪고 있는데,
되새기고 기억하려고 하지만 번번이 그 구간의 기억은 지워지는 그런 증상이다.
엄마의 투병과 죽음과 관련된 시기여서 나도 죽음에 대한 책에 자꾸, 자주 끌려들어 와 읽게 되는 면도 있다.
남겨진 나를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는 행동인지, 이 부재의 상황을 타인의 경험에 기대어 동질감을 얻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주지시키려고 하는 행동인지 모르겠다.

죽음이라는 '급작스러움'과 '불가역성'을 생각하다 보면 늘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상보다 꽤 잘, 빨리 읽히는 글이다.

- 삶은 빠르게 변한다.
삶은 순간에 변한다.
저녁을 먹으러 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알던 삶이 끝난다.
자기 연민이라는 문제. - 9

- 비애란 것은, 맞닥뜨리고 보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 (...) "우리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우리 나이가 몇 살이건 간에, 부모님의 죽음은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들고 뜻밖의 반응을 일으켜 아주 오래전에 묻어 놓은 줄 알았던 기억과 감정을 헤집어 내지요. 우리는 애도라고 하는 그 불특정한 기간에, 바다 밑 잠수함 속에서 지내는지도 모릅니다. 심연의 고요 속에 머물며, 때론 가까이에서 때론 멀리서 회상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뒤흔드는 폭뢰의 존재를 느끼면서 말이지요." - 38

- 비애는 수동적이었다. 비애는 저절로 생겨났다. 그러나 비애를 다루는 행위인 애도는 주의를 집중해야 할 수 있었다. - 192

- 제러드 맨리 홉킨스의 시가 생각난다.
마거릿, 슬퍼하고 있니 / 골든그로브에 잎이 떨어져서? ... 인간은 시들기 위해 태어났단다 / 네가 애도하는 건 마거릿 너 자신이지.
인간은 시들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이상화된 자인이 아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고, 외면하려해도 유한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실을 슬퍼하면서 좋든 싫든 우리 자신을 애도하게끔 되어있다. 우리의 이전 모습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질 존재를.
엘레나의 꿈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엘레나의 꿈은 노화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그 누구도 엘레나와 같은 꿈을 꾼 적은 없다(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61

2025. feb.

#상실 #조앤디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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