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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을 버려라 - 글로벌 금융리더가 말하는 경영 철학과 리더십
김병호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21년 1월
평점 :
저자 김병호씨는 하나은행 은행장(p122),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 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특히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최초로 해외자본을 유치하는 등 큰 업적을 남긴 분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산업 분야에서는 세계 굴지의 기업 여럿을 갖고 있는 등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으나 금융 섹터에서는 미진한 부분이 크죠. 요즘 대한민국에 주식 안 하는 사람이 없는 만큼, 금융 분야에 평생 종사했고 특히 국제감각을 갖춘 원로의 충언은 우리 독자들이 특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영은 마라톤이다(p61)." 흔히 촌놈 마라톤이라는 말을 씁니다. 마라톤은 긴 게임이라서 에너지를 영리하고 신중하게 분배하는 게 레이스의 핵심인데 이를 감안 않고 초장에 힘을 다 빼는 어리석음을 가리킵니다.
경제학의 먼 태두는 스코틀랜드의 애덤 스미스였지만, 1920년대에는 에드가 로런스 스미스라는 이가 "이익 유보의 가치"를 최초로 발견하다시피한 학자였습니다. 그의 이론적 성과는 당시 최고의 경제학자들 중 한 사람이고 현재까지도 거대한 학파를 형성하는 흐름의 창시자인 존 메어너드 케인스가 그 탁월함을 지목하여 더 널리 알려졌죠. 이 책 저자에 따르면, 그전까지만 해도 주식 투자는 단기성 투기 이익이 그 본질처럼 여겨졌으며 기업이 거둔 이익을 재투자하여 복리의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건 대체로 간과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모습과 다를 게 별로 없죠.
요즘 흔한 말로 "가치 투자"라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텐데, 가치투자 하면 어떤 항목이 생각나나요? 바로 워런 버핏이겠죠. 저자는 저에드가 로런스 스미스의 성과를, 작년(2020)에 버핏이 쓴 "주주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재인용합니다. 다름아닌 워런 버핏이야말로 이익 유보의 엄청난 잠재력을 누구보다도 투자 실무에서 증명한 위인이니 말입니다.
과거에도 "기업, 사업"의 형태는 많았습니다. 대개는 파트너의 형태로 몇몇이 조합 비슷하게 만들어서 사업을 유지하다 목적이 달성되면 해산하는 게 보통이었죠. 이런 것이 아니라, 꽤 오랜 동안 지속되어 사회적 신뢰를 쌓고 배후의 투자자, 출자자와는 별개로 독립된 실체를 갖고 사업을 유지하는 걸 계속 기업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going concern(p66)이라고 하는데 현대의 기업은 대부분이 이런 형태이므로 "회사"와 거의 동의어이며 회사 중에 고잉 컨선이 아닌 것은 회사라고 부르기가 힘듭니다(사기꾼이라든가). 금감원이나 거래소에서 상장사들의 행태를 감독하는 건 이들이 "고잉 컨선"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게 하기 위함이죠.
저자는 매우 심각한 문제 하나를 지적합니다. CED의 이해가 기업의 장기 목표와 상충할 때, 예를 들면 "파생상품이 무엇인지 이해도 못 하는 70대 노인에게 펀드를 판매한다든가 하는(p67)" 도덕적 해이가 있겠네요. 만약 그 CEO가, 경영자의 능력 평가 지표인 KPI에 신경 쓰기보다, 저 노인이 내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공감 시도를 한 번이라도 해 봤다면 과연 그런 불완전판매(를 넘어 사기)가 이뤄지게 직원들을 부추길 수 있었을까요?
요즘 키코 판매 배상/보상 문제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배상/보상이 이뤄져도 예컨대 일각에서 나온 대로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게 그 수단이라면 또다른 피해자가 생깁니다. 바로, 현금을 갖고 있다가 졸지에 가치가 (발행분만큼) 떨어지게 된 일반 국민입니다. 잘못이 그 상품을 판 금융기관 측에 정말로 있다면 그 당사자들에게만 날카롭게 책임을 물어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 주면 됩니다. 발권력이라니요.
"인터넷 은행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의 성공 여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시장은....(p129)"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도 카카오톡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공짜 메신저 하나가 과연 무슨 사업 모델이 되겠는가?"라며 괜히 이동통신사의 망에 불필요한 부하만 얹는 장난감 정도로 여겼을 겁니다. 개인 메신저가 일상의 필수품이 된 후, 이 메신저에서 예금, 송금, 결제를 간편하게 행할 수도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제서야 그 무한한 잠재력을 알아보았죠. 이제 거래소 시총에서 카카오는 거대한 공룡 SK텔레콤 등의 가치를 뛰어넘습니다. 아직 카뱅은 본격 상장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기존 은행들이 수십 년 고생 끝에 이룬 성과를 단숨에 뛰어넘었다(같은 페이지)." 허무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것이 새로운 시대 디지털 이노베이션의 좋은 사례입니다. 10년이 더 지나면 삼성 LG, SK 등을 모두 제치고 IT, 컨텐츠, 커머스 등 핵심 캐시카우를 두루 지닌 카카오가 최대기업이 되지나 않을지요.
"우리는 지금 기존 산업 규범이 파괴되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더는 변화를 주저할 수 없다.(p128)" 그렇습니다. 변화를 거부하면 그저 변화하지 않은 채 현상이나마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도태될 뿐입니다. 이런 자기 혁신, 파괴적 혁신을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가치와 신념과 원칙과 노하우와 지식을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해야만 합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사고가 난 건 그 피해가 막심한 데에도 이유가 있지만, 일본 같은 나라에서 어쩌면 저런 초보적인 실수와 서투름과 무능, 무대책이 노출될 수 있느냐는 충격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본과 오랜 동안 적대 관계였던 러시아가 원전 정책을 근본에서 다시 검토했다고 하죠.("일본이 저럴 정도면...") 러시아는 구 소련 시절에 체르노빌에서 큰 사고가 난 적 있고, 결국은 이의 성공적인 수습이 되지 않아 7년 후 체제가 붕괴하는 데 일조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저자가 p147 이하에서 특히 이런 일본의 서투르고 바보스러운 행보를 지적하는 건, 과거의 영화에 만족하다 개선과 개혁의 적기를 놓치고 도통 정상궤도로 복귀할 가망이 안 보이는 그들의 예에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뭘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한국은 20세기 후 청년층 인구 비율이 가장 낮은 편인 시기를 보내는 중입니다. 이렇게 해당 연령층 인구 수가 적은 데도 취업난은 사상 최악 수준입니다. 어제도 어느 대기업이 "공채"를 중단하고 수시채용으로 전환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이 어떤 정규 수단으로 직업을 얻을 방법은 공무원 시험 통과나 공기업 면접 합격 외에는 별 수단도 없게 되었습니다. 은행의 많은 직원이 50대 중반이면 명예퇴직 등으로 회사를 떠나고 있다(p163)."는 말이 책에 나오지만, 은행 등 금융기관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대기업이면 30대 후반, 40대 초반에 이 일을 겪어야 합니다.
임금피크제는 원래 베테랑 사원 고용 유지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채택되었습니다. 중진의 암묵지를 현업에 적용도 하고 자리로 보전해 주는 하나의 지혜였는데, p163에 보면 이 제도 역시 노장들을 쫓아내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시니어를 밀어내는가? 동기 부여가 어렵고 조직 분위기를 저해하는 면이 있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소중한 인적자원, 바로 회사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잘 육성한 지혜와 기술을 채 써먹지도 않고 버리는 거나 맡찬가지라는 취지로 저자는 안타까워합니다. 조직이 이처럼 비정해지는 건 책의 주제에 비추어 짐작건대 아마 공감 능력의 부족에 기인한다고 분석하시는 듯합니다.
2018년 6월, 드디어 GE, 즉 제네럴 일렉트릭이 다우존스 지수에서 퇴출되었습니다(p207). 사실 이 회사는 우리가 어렸을 때 위인전에 빠지지 않고 나왔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과도 깊은 관련이 있죠. 어디 저 회사뿐이겠습니까? 2020년 8월에는 한 세기 동안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한 정유회사 엑손 모빌이 다우에서 쫓겨났습니다(책 p211에 나오네요). 이런 걸 두고 우리는 상전벽해라고 부르죠. 이처럼,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Nothing lasts forever)." 책에는 여러 명언, 앨프리드 슬론이라든가 잭 웰치의 유명한 언명 등이 나와 우리 독자들의 경각을 촉구합니다. 연구하지 않고 공부 안 하는 그 어떤 거인도 지금 일본이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배구조(governance. p231, p170 등)라는 건 이제 시대적 아젠다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 SK는 약간 뜬금없이 기업 지향성으로 ESG를 부각했는데 물론 SK뿐 아니라 경영계 전반에서 작년 즈음부터 부쩍 잦은 빈도로 이를 거론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이 전면적으로 이를 표방한 건 좀 드문 현상이긴 하죠. 이 책은 p171에서 이를 제법 상세히 다루는데, 해당 페이지 각주에도 나옵니다만 작년(2020) JP모건에서 낸 리포트가 (ESG라는 신 약어부터 해서) 아마 유행의 직접적인 트리거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책은 이처럼 비교적 최신의 이슈를 본문에서 자주 언급해 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아 물론 거버넌스 이슈는 독자인 제가 학생 시절에도 있던 말이긴 합니다. ESG라고 한 세트로 묶어서, 증권가에서조차 트렌드로 포착한 게 최근이라는 거고요.
그 이른 시기에 해외에 진출하여 다양한 국제 경험을 쌓은 저자조차 "해외 진출이 곧 국제화를 만드는 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p261)." 우리 흔한 상식과는 정반대인데, 외국에 어떤 획사가 진출하여 지점을 만들면 그 지점에는 누가 근무해야 할 것 같습니까? 아마 우리 나라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해당 국가의 사정을현지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현지인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유안타증권은 대만 회사인데, 거기 근무하는 직원들은 대부분이 한국인입니다. 이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럼 국제감각은 누가 갖춰야 하는가? 바로 회사의 본점입니다. 본점에서 국제 정세와 트렌드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전략을 세워서 지점에 전달해야지, 그 반대가 될 수는 없는 거죠.
한국 회사들은 보안을 위해 이메일 소통을 주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근무한 세계은행조차도 당연히 이메일을 활용하며, 보안 운운은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라고 합니다(p262). 외국인을 거리낌 없이 쓰면, 하다못해 영어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수고조차도 덜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의식구조와 인프라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어떤 기업이건 조직이건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