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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해도 넉넉하다 - 천년의 지혜와 만나는 안대회의 세상 이야기
안대회 지음 / 김영사 / 2009년 7월
평점 :
넉넉한 선조들의 품에 안기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늘 설렘이 함께하는 나에게 우리 선조들의 고전읽기는 로맨스다. 그 기분이 극에 달하는 것은 선조들의 글속에 담긴 느낌에 공감하는 짧은 시간 그 후로 오랫동안 남는 긴 여운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내가 선조들의 글을 많이 알거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혼자 즐기는 나만의 호사라 생각한다. 그런 느낌을 받는 글을 다시 만났다. [부족해도 넉넉하다]라는 책에 담긴 글들이다.
[부족해도 넉넉하다]에는 우리 선인들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오롯한 세상이야기들로 가득하다. 50여 편에 달하는 선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영위하고 세상을 보는 지혜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 담긴 이야기들은 소위 인생에서 잘나가는 때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아니다. 신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상을 달관하듯 자신을 돌아보고 넉넉한 가슴으로 사람들을 품어내는 이야기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에서 보여주는 고집을 넘어 아집처럼 보이는 심노승의 글에선 눈살 찌뿌림 보다는 웃음이 번진다. “무릇 사람이 불초한 자식을 두면 죽은 날 제삿밥 얻어먹기도 힘들다!”라고 말했다지만 당사자들이야 어찌되었건 박세당과 박태보의 부자자간이 부럽기도 하다. 권득기의 [소금장수 백상루 구경]에서는 세상이 자신의 가슴에 담긴 빛깔로 보이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천하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님과 그것을 바라보는 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짐 또한 알게하는 글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다가 제주도 유배길로 밀려나 자신을 돌아보며 아들에게 쓴 유언호의 [아들에게]에 나오는‘내가 가진 책을 내가 읽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내 인생을 마치려 한다’는 생의 말년에 자신을 돌아보고 느끼는 깊은 울림이 있다.
또한 송덕봉이 쓴 [생색내지 마라]에선 조선시대 부부간의 단면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봉건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도 자신에게 당당했던 부인의 말에서 지아비를 압도하는 글맛이 포스가 담겨있다. 미암일기의 주인 유희춘은 이 글을 보며 어떤 얼굴이였을지 몹시 궁금하다. 김원행의 글 [죽은 벗에게 책을 보낸다]에선 가슴 뭉쿨한 배려를 볼 수 있다. 죽은 벗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다면 살아생전 두 사람의 마음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족해도 넉넉하다]에 담긴 선비들의 마음도 좋지만 그를 해설하는 저자 안대회의 이해의 마음과 글재주 또한 돋보인다. 원문에 대한 해설보다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글이 많다. 한자 실력이 미치지 못해 원문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부록처럼 실려있는 원문을 찾아보는 즐거움 또한 크다. 두고두고 찾아볼만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사는 세상이다. 그 속엔 생, 노, 병, 사, 희, 노, 애, 락 이 모든 것이 담겨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이지만 세상을 달관하는 넉넉함, 날카로운 풍자, 따스한 감성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하고,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남을 탓하고, 악태와 추태가 만연한 세상, 시대가 바뀌고 사람도 변했다고 하지만 근본이야 그대로 아닐까 싶다.
청명한 가을날 달빛이 좋은 밤이 되면 마음 나누는 벗이 있어 함께 그 달빛 비추는 술잔을 기울이며 미소 짓는 작은 소망 하나를 꿈꾼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갖춰져야 할 것들은 많지만 아직 준비한 것들은 하나도 없다. 널따란 대청마루도 없고 권필 같은 대장부, 김원행 같은 벗도 없고 기광사의 성중 같은 친구 역시 없다. 그렇더라도 놓고 싶지 않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