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를 일등으로 - 野神 김성근
김성근 지음, 박태옥 말꾸밈 / 자음과모음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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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삼성 라이온즈 대 엘지 트윈스 간의 혈투는 한국 야구사의 명승부로 기록된다. 시리즈 전적 3 대 2로 삼성이 앞서고 있지만 9회말 현재 엘지가 9 대 6으로 3점을 앞서고 있어, 엘지는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릴 좋은 기회를 잡았다. 엘지 김성근 감독은 현재까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경험이 없다. 마무리 투수 좌완 이상훈이 등판했다. 삼성은 선두타자 김재걸이 중견수를 넘겨 펜스를 바로 강타하는 홈런성 2루타를 치고 진루했다. 다음 타자 강동우를 삼진으로 돌려 세운 이상훈은 다음 타자 브리또에게 볼넷을 허용했다. 원아웃, 주자 1, 2루. 다음 타자 이승엽이 힘껏 방망이를 돌렸다. 극적인 동점 3점 홈런, 한순간에 승부는 9 대 9 동점이다. 구원 투수가 등판했다. 최원호와 승부하던 4번 타자 마해영의 스윙이 무겁게 느껴졌다. 우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이다. 홈관중의 환호와는 달리 김성근 감독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2008년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 대 두산 베어스 간의 5차전이다. 8회말 무사 1, 2루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SK에게 또다시 위기가 찾아 왔다. 스코아 2 대 0으로 SK가 앞서고 있지만, 무사 만루의 역전 위기이다. 국민 2루수란 애칭을 가진 고영민이 투수 옆 땅볼로 원 아웃, 숨돌릴새 없이 다음 타자는 정규 시즌 타격왕 김현수이다. 딱 소리와 함께 타구가 투수 앞 땅볼이다. 병살로 처리하면서 경기 종료. 졌다고 생각한 게임에 마침표를 찍고서 작년에 이어 김성근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2연패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야구 경기를 흔히 인생의 축소판에 비유한다. 우리들의 인생에 성공의 기회가 세번 찾아 오듯이, 야구 경기도 경기중 세번의 득점 기회가 찾아 온다고 한다. 목전에 둔 승리가 한순간에 패배로, 또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잘 넘기고 승리를 맛보는 이와같은 명암이 늘 드리워지는 것이 야구라는 경기이다. 전문가들에게 약팀으로 평가되던 SK 와이번스의 사령탑을 2006년 10월에 맡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김성근 감독의 성공스토리를 만나 보자.

 

야구에 대한 열정

 

경남 진양군 깡촌 출신인 그의 부모들은 생계를 찾아 일본 땅 교토의 한인 밀집촌인 나가야에 정착한다. 그는 이곳에서 1942년 태어나 어릴적부터 가난에 매우 익숙했다. 다다미 열 두 장이 깔린 방 두 개의 작은 집이 육남매의 보금자리였다. 당시 재일 동포의 삶이 대개 이러했다. 부모는 물론이고 형, 누나들 모두 돈벌러 나가야만 했다. 홀로 남겨진 그의 놀이터는 가쓰라江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물놀이, 고기잡기, 멱감기 등으로 소일하며 성장했다. 일본 학교에 다녔고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야구를 즐겼다. 실력이 부족해서 자신이 가고픈 야구 명문고엔 진학을 못하고, 대신 설립된 지 3년 밖에 안된 가쓰라고교에 입학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야구부가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듯, 그도 심부름, 주전자 당번, 훈련, 또는 기합 등의 신입생을 거쳐 2학년 부터는 본격적인 투수연습을 했다. 그 때부터 그는 연습 벌레였다. 학교가 파하면 가쓰라江에 매일 돌멩이 2백 개를 던졌다. 워낙 가난한 탓에 방망이와 글러브는 그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그는 야구 용품을 사기위해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것은 그에게 튼튼한 하체와 영양 공급이라는 덤을 주었던 셈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쓰러질 때까지 "펑고"라는 수비훈련을 시키면서 그는 2학년때 후배들에게 "악마"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보통 이런 훈련은 감독이나 코치 또는 3학년 고참이 맡아서 하는 것이었는데, 그에게 맡길만큼 그는 카리스마가 있었던 듯하다. 학교 인근에 높이 924 미터의 아타고 山은 정상까지 약 5 킬로미터 거리이다. 그는 고시엔 대회를 앞두고 여기를 뛰어서 올랐다. 낙오자가 생기면 업고서 올라 가기로 작정하며 훈련했다. 이는 협동심 배양과 팀워크를 강화하는데 매우 유익했다. 이후 그는 지도자 시절에 이런 훈련을 많이 도입했다. 

 

실패로 부터의 교훈

 

일본의 고교 야구 선수들의 꿈은 고시엔 대회의 본설 진출이다. 김성근도 자신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 지역 예선에 출전했다. 1회전 부전승으로 통과하고, 2회전에서 만나 팀과 9회말 투아웃까지 7 대 6으로 이기다가 외야수의 실책으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이는 그에게 평생 교훈을 남겨 주었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 그의 끈끈한 야구는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한국으로의 진출

 

1959년 8월, 4회재를 맞은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으로 그는 한국땅을 밟았다. 전쟁으로 침체된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기획된 친선 경기였다. 8월 한 달 동안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을 순회하며 지역의 야구 명문고들과 시합을 했다. 그는 8월 9일 중앙고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5회까지 무려 삼진 11개를 잡아내며, 8 대 0으로 승리했다. 언론은 좌완 투수인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편, 부산 경남고와의 경기 도중 투수가 던진 공이 4번 타자 박영길의 머리를 맞췄다. 관중들은 "쪽발이"란 소리와 함께 야유가 심했다. 이로 인해 그는 삐딱선을 탄 조국의 감추어진 발톱에 의해 평생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부산 동아대 야구선수로 스카우트되었다. 1960년엔 교통부에 스카우트되어 실업 야구선수로 등록하고, 제 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교통부의 김일배 감독은 초고교급 타자 백인천을 길러낸 명장이며 스타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했다. 한달 훈련이 마치 10년 치 훈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편,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선 자유중국(대만)과 함께 공동 2위를 기록했지만, 알본과의 격차가 많이 줄었음을 자축하면서, 만 스무 살의 좌완투수 김성근의 화려한 전성기가 도래했다고 야구인들은 축하해 주었다. 1962년 그는 실업팀 기업은행으로 이적한후 실업야구에 시즌제를 도입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자, 그는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어머니를 비롯,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는 평생 야구를 하고 싶어서 한국을 선택한 것이었기에 야구만 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야구는 그의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1964년 그의 기록은 20승 5패이다. 당시 투수들은 많은 투구로 게임당 150개 투구는 기본이었다. 참고로 WBC 대회의 투구제한은 80개이다. 그의 어깨는 아프다는 신호를 계속 보냈다. 타자로 전향하여 한 경기에서 홈런도 두 개치는 등 활약도 해보았지만, 1965년엔 통증이 더 심했다. 결국 이듬해 그는 나이 스무 다섯 살에 투수 생활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선배의 소개로 이화여대에 재학 중인 배필을 만나 1967년 3월 결혼하여 평범한 은행원 신분으로 돌아 갔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며

 

1969년 여름, 기업은행 간부의 요청으로 경남 마산상고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승수보다 패수가 많았던 팀으로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훈련에 또 훈련, 견디지 못한 일부 선수들은 도망을 쳤다. 이때 그는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 비로소 독서를 시작했다. 현재 그의 서재엔 야구서적만 5 백권이 넘는다. 이후, 만 29세에 기업은행 감독으로 취임, 1973년 구가대표팀 코치, 1976년 충암고 감독, 1979년 신일고 감독 등을 거치면서 OB 베어스 코치와 감독, 태평양 돌핀스 감독, 삼성 라이온스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엘지 트윈스 감독, 일본 롯데 마린스 코치, 그리고 SK 와이번스 감독 등 프로 야구의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야구계에선 김성근 감독을 야인으로 분류한다. 직설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함으로써 구단주와의 불화로 임기를 못채우고 사령탑에서 두 차례나 쫓겨난 그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후회없는 행동에 떳떳하기만 하다. 약팀으로 분류된다던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맡아 자신의 전매특허인 스파르타식 훈련을 실시하여 강팀으로 팀칼러를 바꾸고 지난 2년간 무적으로 군림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자신의 야구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 다소 섭섭함을 표현하면서 자신은 "지지않는 야구"를 추구한다고 역설한다. 수많은 좌절과 실패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 야구의 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그의 野生野死는 언제 끝이 날지 주목된다. 그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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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사고를 키우는 업무의 기술 - 회사가 탐내는 인재의 조건
하마구치 나오타 지음, 강민정 옮김 / 비즈니스세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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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것인지 물으십시요!"

1961년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존 F. 케네디가 취임사에서 행한 명연설이다.

 

직장 생활을 현재 하고 있거나, 한 적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처음 직장에 발을 내딛자 자신들에게 주어진 업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 방법을 몰라 당황해하며 고심에 빠진 경험이 한 두번 쯤은 있을 것이다. 업무 처리 능력이 뛰어난 특별한 초보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을 처리하는 요령이나 기술이 부족해서 쩔쩔매게 된다. 이 책이 이런 고민의 해결을 자처하고 있다.

 

저자 하마구치 나오타는 국제 비즈니스, 경영 컨설팅 회사인 주식회사 JCI의 창업자이자, 국내외로 폭 넓은 활동을 하는 경영컨설턴트이다. 그는 20년 넘게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100 가지의 업무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질문하라"는 첫번 째 업무기술부터 "회의 시간은 상사보다 먼저 가서 기다려라"는 백번 째의 기술까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는 사항들도 많다. 알고 있는 내용에선 복습의 의미로 다가 왔고 몰랐던 사항에 대해선 유익한 업무기술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했다.

 

아픈만큼 성숙해 진다.

 

16대 미국 대통령 링컨의 칠전팔기나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의 좌절 스토리 등은  꿈을 갖고 도전하는 모든 이에게 훌륭한 귀감이다. 실패를 거듭하는 자신의 신세 타령에 젖지 말라. 꿈은 노력하는 자에게만 그 문을 열어준다고 한다. 불굴의 의지, 끊임없는 도전 정신은 결국 자신을 업무의 달인으로 보답해 줄 것이다. 논리는 다음 문제이다. 일단 시도하라. 창피함은 순간이다. 모르는 것은 끈임없이 질문을 하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임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바른 자세를 가져라.

 

흐트러진 복장은 흐트러진 마음가짐으로 연결된다.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복장과 태도에 주의를 기울여라.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심신이 해이해 질 수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눈에 몹시 거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집중력이 떨어져 무슨 일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명하지 않고, 약속 시간보다 5분 먼저를 실천하는 것도 바로 바른 자세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학창 시절 바른 자세를 강조했던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직장은 배움터이다.

 

여러 사람들이 부댓기면서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싦의 현장인 직장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는 교육 현장이다. 전에 경험치 못한 많은 일들을 실전을 통해 배우면서 건전하게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말고 배우라. 또한, 여가 시간도 헛되이 낭비말라. 취미생활이나 배우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설레는 맘으로 매일을 살아 가면, 업무 효율도 높아지고 일의 성과도 덩달아 좋아질 것이다. 아울러,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지식을 흡수하라. 김종래의 [쿠빌라이 칸]에 의하면, 대원제국을 창업한 쿠빌라이는 국가경영에 참고하기 위해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프로의식을 가져라.

 

출발이 같을 지언정, 시간이 경과할수록 입사 동기들의 위치에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 차이는 바로 노력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매 과정마다 자신을 갈고 닦아야만 진정한 프로가 된다. 또한, 남의 허물을 비판할 시간이 있으면 먼저 자신을 갈고 닦아라. 프로라면, 누가 시키기전에 스스로 먼저 찾아서 일을 해야 한다. 세미나와 이벤트는 모두 참석하면서 지면을 넓히고, 매일 아침 경제신문을 정독하면서 비즈니스에 관한 지식도 넓혀야 할 것이다.

 

벤처형 인간을 지향하라.

 

벤처(Venture)란 모험, 모험적인 시도, 또는 투기 등으로 해석된다. 불황일수록 기업은 벤처형 인간을 원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모험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이를 즐기는 도전 정신과 이에 대비하는 준비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전 준비는자신의 책임감을 향상시키고 창의력도 증진시켜 줄 것이다.

 

 

회사는 케네디 대통령의 명연설을 이렇게 바꿀 것이다. 

"회사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회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으십시요!"

따라서, 내 주변을 늘 깨끗이 정돈하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한 전문지식 배양을 게을리 말 것이며, 그리고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벤처형 직장인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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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리더 쿠빌라이 칸 - 칭기스칸의 손자, 사상 첫 세계제국을 만들다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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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1215 - 1294년)는 징기스칸의 손자로서 몽골제국의 제 5대 칸이자, 대원제국의 창업자이다. 할아버지 사후에 휘몰아친 권력투쟁 속에서 그는 현명하고 강한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훗날을 도모하다, 1260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다. 지금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민족으로 중국 중원의 황제가 되었으며, 인류사 처음으로 글로벌 경영 시스템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비친 그는 고려 25대 충렬왕의 장인이기도 한데, 그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초원과 말의 시대"를 "바다와 배의 시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인물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비친 대원제국의 문화와 문명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이 책을 탐독하고서 대항해의 모험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제 쿠빌라이 칸의 업적과 리더십을 만나 보자.

 

대운하 프로젝트

 

쿠빌라이는 만리장성 이남에 위치한 수도, 大都의 건설을 장장 26년에 걸쳐 1292년에 완성했다. 그는 물류 네트워크에 촛점을 맞춘 신국가를 구상하고 있었다. 도시 중앙에 적수담이란 인공호수를 만들어 하루에 배가 일천 여척 넘게 통행토록 함으로써 전에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적수담에서 밖으로 향하는 네트워크의 핵심은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운하를 이용한 수송비용은 육로수송의 10%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1292년 적수담과 통주를 연결하는 通惠河를 완성한후, 북경에서 항주를 잇는 "경항대운하" 프로젝트를 착공했다. 중국이 낳은 천재 수학자 곽수경의 설계와 감독하에 갑문식 도크 방식으로 장장 1792 킬로미터의 운하를 건설했다.

 

기존의 물류는 중국 수당시절에 만들었던 운하의 방향이 고도 장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장안시스템을 개혁하여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를 위한 신국토 디자인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마지막 꿈, 바다로 나가는 것은 운하의 종착지를 천진으로 정함으로써 완성이 된다. 기존의 通惠河와 천진을 잇는 새로운 운하, 直古운하가 건설된 것이다. 천진은 처음 강남물자의 수송로로 구상되었다가 국제항구로 발전한 것이다.

 

외국인에게 비친 운하의 모습

 

유대인 상인 야콥 단코나는 아드리드해의 항구도시를 출발해 1270년 중국남부 泉州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 6개월을 머물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이를 토대로 여행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 [빛의 도시]는 유럽에 소개되면서 월계수란 뜻의 "자이툰"이란 이름을 얻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와 비교할 때 어마 어마한 천주의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대규모 무역항인 자이툰은 빛의 도시이다. 밤이면 거리마다 대단히 많은 기름 등불을 켜고 횃불을 밝혀서 아주 먼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도시가 밝게 빛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인구 30만명이 넘는 도시, 1만 5천 척의 배가 정박하는 거대한 항구이자 세계인이 모이는 국제시장, 그의 여행기에 비친 것처럼 운하와 항구를 통하는 물의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쿠빌라이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초원에서 바다를 꿈꾸고, 바다를 호령하다

 

쿠빌라이는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동서고금의 제국의 사례들을 벤치마킹하여 유목과 농경에 바다를 추가한 대원제국을 구상했다. 대도와 상도를 거점도시로 하고, 초원과 중원이 연결되도록 남북으로 350 킬로미터의 거대한 타원형의 메트로폴리스가 건설되었다. 대원제국의 해상왕 "손수경"은 베트남, 태국, 버마, 자바, 수마트라에 이르는 원정길에 올랐다. 각국을 방문하며 자유무역을 제안하는 통상사절단의 역할이었는데, 동남아 각국은 이에 열렬히 호응했다. 이후 명나라 때 정화가 거대선단을 이끌고 무려 7차에 걸쳐 18만 여 킬로미터를 항해하여 멀리 아프리카 동부연안까지 왕래한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적과의 동침

 

대만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쿠빌라이 사냥도]를 보면, 얼굴색이 검은 사람들이 보인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흑인이 분명하다. 대원제국은 이민족도 수용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몽골의 군사력에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행정력과 색목인의 상업력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목표로 했다. 따라서, 그는 공존의 원칙아래에서 대원제국의 시스템을 운영할 엘리트를 모았다. 한인 참모 유병충을 위시하여, 종교와 통역담당 참모인 시리아인 이사 켈레베치, 경제분야 참모인 위구르인 아흐마드, 신중하며 용맹한 장군 비얀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마디로 거대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콘소시엄 방식을 채택한 셈이었다.

 

쿠빌라이노믹스

 

대원제국에서 큰 거래엔 은이 사용되었지만, 적은 금액의 거래엔 "교초"란 종잇돈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은과 교초의 단점을 해결한 화폐가 염인이었다. 당시 염인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지금에 비유하면 달러와 같은 존재였다. 이는 대원제국 금융시스템의 완결판인 셈이었다. 또한, 대외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유럽과 아랍인들이 선호하는 도자기를 적극 생산했다.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량생산이 요구되자, 도자기를 굽는 재료로 기존의 장작대신 남송시절 개발된 석탄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에너지 혁명을 단행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이를 "검은 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쿠빌라이는 버림받은 칸의 손자였으며,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징기스칸의 창업정신을 가슴속에 새기며 살았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전투 현장에 나섰고, 티베트인에겐 허리를 굽혀 타협도 하면서 그는 후손에게 물려줄 자랑스러운 신화를 스스로 당당하게 개척했다. "결단력 있는 자만이, 결단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위대한 통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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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돈
김열규.곽진석 지음 / 이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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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돈은 필요한 물품을 구매키 위한 수단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삶의 목적으로 여기고 있다. 돈은 정말 별나고도 별나다. 돈이 사람을 살리기도 때로는 죽이기도 한다. 이에 돈의 역사, 돈이 보여주는 애환과 예술 속에서의 돈에 대한 평가 등을 살펴 보려 한다.

돈의 역사

돈을 한자로는 金, 錢, 貨幣, 通貨 등으로, 영어론 머니, 캐시, 코인 등으로 표현한다. 선사시대의 인도와 중국에서는 조개를 돈으로 사용했는데, 20세기에도 남태평양 일부 섬에선 여전히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돌멩이도 돈으로 사용되었다. 문화인류학자인 말리노프스키는 그가 탐사한 남태평양 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확인했다고 한다. 큰 것은 직경이 무려 5 미터라니 그 섬사람들은 천하장사들이었나 보다. 돌, 즉 石貨는 크고 무거워서 수송과 보관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종잇돈이 출현했다. 세계 최초의 지폐는 1287년 원나라에서 발행한 "지원통행보초"라고 한다. 서양에서도 스코틀랜드人 존 로우에 의해 지폐가 탄생했다. 그는 프랑스로 도망친 탈옥범인데, 전문도박으로 큰 돈을 벌자 휴대가 불편해서 궁리끝에 이를 발명했다고 한다. 역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

우리 대부분 古貨幣하면 주화인 엽전을 떠올린다. 고려시대의 삼한중보,동국통보,해동통보 및 해동중보등의 엽전은 모두 유통에 실패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조선통보와 상평통보가 세상에 나왔다. 구한말에서 일제치하로 넘어가면서 조선은행이 지폐를 발행하자 이들 엽전은 무용지물이 되어 동네 아이들의 제기차기 용도로 사용되는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조선후기 한치윤의 저서 [해동역사]에 따르면, 기원전 957년에 사용된 母子錢이라는 鐵錢이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기에 인정받기 어렵다. 고려시대엔 중국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유통경제가 급속히 발달하지만 당시엔 당나라 화폐 또는 송나라 화폐 등 중국의 주화나 물품화폐가 이용되는 실정이었다. 이에 필요성을 느낀 고려 성종은 996년 왕실 주관하에 건원중보를 만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정부가 만든 화폐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민간에서 별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화폐로서의 기능이 점차 소멸되었던 것이다.

돈의 애환, 이모 저모

당나라때 장고의 저서 [유한고취]엔 "錢可通神"이란 표현이 나온다. 즉, 돈은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얘기이다. 또한, 조선시대엔 매관매직이 성행해서 돈으로 벼슬까지 살 수 있었으니, 돈은 타락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정월 초하루 어른들로부터 받던 세뱃돈은 복의 상징이었다.

돈은 인간이 생존함에 있어 필수조건중의 하나임엔 틀림없다. 그렇지만, 돈을 둘러싸고 자행되는 살인, 절도, 폭력 등 수많은 해악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사회를 부폐시킨다.

예술속에 비친 돈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선 주인공 복녀가 돈을 벌기위해 매춘까지 하는 도덕적인 타락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몰리에르의 연극 [수전노]에선 잃어버린 돈을 찾으려는 아버지가 수사관에게 친딸과 자신도 피의자로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는 촌극을 벌인다. 이에, 딸이 돈을 찾아주면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겠냐고 질문하자 즉답을 할 정도로 돈에 대한 탐착이 대단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영화 [돈가방을 든 수녀]에서는 돈가방을 훔쳐서 추격을 피해 수녀원으로 도망친 강도의 돈가방이 우연히 수녀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이 부정한 돈임을 수녀는 알지만, 자신이 경마로 탕진한 수녀원 예산을 벌충키 위해 오히려 이돈을 "하느님의 기적"으로 믿는다는 내용이다.

1988년 10월 16일, 교도소 이감중 도망친 지강헌 일당은 서울시 북가좌동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이 장면은 TV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특히, 이들은 "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절규하면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 즉, 5백만원을 훔친 자기보다 6백억원을 횡령한 전경환의 형기가 더 짧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후 이 사건은 [홀리데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번 것을 불우한 이웃이나 장학재단에 쾌척하는 돈에서는 향기가 난다. 반대로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이용해 불법으로 착복한 돈에서는 썩는 냄새가 난다. 돈은 수단이지 결코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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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생존전략 - 막다른 길을 헤쳐 나가는 생존의 지혜
카도 아키오 지음, 박금영 옮김 / 앱투스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궁인지사 번역파비窮人之事 飜亦破鼻"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는 뜻이다. 일을 해보려고 하면 실패하는 사람들 혹은 억수로 운이 없는 사람들을 두고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퇴근길,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뒷 사람에게 떠밀려 떨어져자 마침 들어온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거나, 혼잡한 주말극장안에 화재가 나서 급히 피신하다 옆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진 채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밟혀 사망하거나, 또는 횡단보도 신호등의 파란불을 보고 건너는데 신호를 무시한 차량이 덮쳐서 화를 당하는 경우 등 처럼 우리들의 인생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격으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건들이 왕왕 벌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유형을 막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즉 일이 아무렇게나 마구 되는 형국을 말한다. 막판에는 생명, 비즈니스, 그리고 재산에 치명적인 손실을 주는 것들이 있다. 생명에 대한 악영향외에도 친구에게 보증을 잘못 서서 살고 있는 집이 경매에 넘어가거나, 회사에서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하는 경우 등도 있다. 이렇듯 인생은 온통 가시밭길이다.

 

이 책은 61 가지의 경미한 막판에 대한 처세 요령을 제시하고 있다. 상사가 여직원과 함께 러브호텔에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상사 몰래 험담을 나누는 입방정을 떨다가 현장에서 상사와 마주친 경우, 또는 동료들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방귀를 뀐 경우 등처럼 난처하면서도 막다른 길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막판을 능숙하게 헤쳐 나가는 사람들은 대개 출세하는 사람들이며, 능력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막판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떠한 행동과 재치있는 말들로 상대방의 기분을 망치지 않고 재치있게 탈피할 수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설명하고 있다. 

 

회의중 방귀가 나올 경우 괄약근에 힘을 주면서 조금씩 방출하라거나, 딸꾹질이 나온다면 목을 뒤로 젖히고 숨을 잠시 멈추라던가, 졸음이 오면 심호흡을 반복하라던가, 또는 코피가 터지면 티슈로 코를 막고 콧망울에 압박을 가하라는 등의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비즈니스는 약속의 연속이다. 걸려 오는 전화에 응답하느라고 빠듯하게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그런데, 지하철이 사고로 멈추는 경우가 발생했다. 늦을 것이 확실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상대에게 전화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솔직히 사과하라고 한다. 반면 중복된 약속의 경우엔 누가 죽었다는 식의 불가피한 사정이 생겼다고 한 곳에다가 거짓말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치사한 거짓말로 위기를 돌파해야 할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자주 이용할 방법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 책은 모두 5 장으로 구성되어 회사에서의 막판, 거래처에서의 막판, 일상 속의 막판, 그리고 욕망에 의한 막판 등으로 나누어 다양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대응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그 방법이 적절하고 유익한 내용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있다. 음주운전을 하다 단속에 걸린 경우, 면허취소를 피하기 위해 도망을 치거나 또는 정치권의 유력인사를 이용하라던가, 불륜 현장을 아내에게 들킨 경우 소위 오리발로 일관하라는 등의 요령은 그야말로 주간지 가십거리이다. 잘못이 있는데도 거짓말이나 치사한 행동으로 위기를 벗어날 것을 권하고 있다. 변명을 가르치고, 요령을 말해준다. 그러나, 잘못을 했다면 진실한 사과와 정직한 설명이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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