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로드 7000km - 의열단 100년, 약산 김원봉 추적기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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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약산로드 7000km>라는 책을 이야기할게. 이 책은 아빠가 4년 전에 읽은 <임정로드 500km>란 책이란 같이 샀었는데, 이제서야 읽었구나. <임정로드 4000km>를 읽은 것이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독서기록을 찾아보니 4년 전이었더구나. 참 세월 빠르다. <약산로드 7000km>란 책은 책 제목에 힌트가 있어. 약산 김원봉에 관한 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단다. <임정로드 4000km>가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여행 가이드라고 하면, <약산로드 7000km>는 약산 김원봉과 그가 이끌었던 의열단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여행 가이드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19년이기 때문에, 이 책에 나와 있는 여행 정보가 지금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구나. 하지만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활동했던 장소들은 그대로일 테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여행 가이드가 될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 길이 7000km라고 하니, 쉽지 않은 길이겠다는 생각은 들었어.

약산 김원봉. 아빠가 약산 김원봉에 대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해서 너희들도 이름은 익히 알고 있겠지. 영화 <암살>에서도 잠깐 등장했던 약산 김원봉. 우리나라가 해방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에 손꼽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친일파 고문기술사한테 치욕적인 고문을 당하고 북으로 갔다고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 그런 반면 20년 동안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가 처벌도 받지 않고 잠시 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현충원에 안장되는 현실이런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라는 것이 아주 열 받는구나. 현충원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주변에 친일파들의 무덤이 같이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복장 터지실까. 심지어 공식적인 친일파 명단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도 현충원에 묻혀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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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0)

반 토막 난 독립운동사에 약산의 이름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첫 번째 이유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일파 7인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인사들이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 다시 국군으로 돌아와 보란 듯이 현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고 각각 군 사령관과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이 됐다.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묻힌 일본군 장교 출신 신태영과 이응준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 묘역과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들이 묻힌 장군 제2묘역이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들 친일파의 묘역이 애국지사 묘역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친일파 무덤이 애국지사 무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형태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름 없이 쓰러져간 수만의 독립군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대한독립군 무명 용사 위령탑역시 친일파 묘역 입구 하단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령탑 아래가 의열단 출신 김익상과 김상옥, 박재혁, 곽재기, 최수봉, 이종암 등이 잠든 애국지사 묘역이다. 한마디로 친일파의 무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다 바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보다 더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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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무덤을 이장하는 법안이 국회에 여러 번 상정되었지만, 폐기 또는 체류 중이라고 하더구나. 이 책이 2019년에 나왔으니, 그 이후에 진전이 있나 검색해 보니 여전히 현충원에 친일파들의 무덤이 있는 것 같구나. 빨간당이 자신의 색깔에 맞게 여전히 친일 행각을 벌이고 있으니, 이런 일조차 험난한 길이 되는구나. 몇 달 전에도 국회에서 친일파 백선엽을 미화한 영화 시사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아빠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런데 그런 일본의 국기를 닮은 빨간당을 지지하는 동네 중에 밀양이라는 곳이 있단다. 아주 높은 지지율로 빨간당을 지지하는 그런 곳이란다. 약산 김원봉의 서훈을 앞장 서서 반대하는 빨간당을 지지하는 밀양이라는 곳이 바로 약산 김원봉의 고향이란다. 자기 고향의 자랑스러운 위인의 업적을 깍아내리는 정당을 눈감고 지지하는 곳. 이 또한 아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

밀양은 약산 김원봉뿐만 아니라 많은 의열단과 독립운동가들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는구나. 김원봉의 고모부로 독립운동을 한 황상규, 윤세주, 김대지, 고인덕 등이 독립 유공 애국지사 80여 명이 이 곳 출신이란다. 밀양은 의열의 도시라 할 수 있어. 그래서 의열기념관과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단다. 그리고 약산 김원봉의 아내에서 독립운동가로 전투 중에 총상으로 운명을 달리한 박차정 지사의 묘도 밀양에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박차정의 묘가 너무 초라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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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6)

1910년에 태어나, 약산보다 정확히 12살 어렸던 박차정 지사는,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를 지냈던 부친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분노해 자결했다. 숙부 박일형과 친척들, 오빠들도 모두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외가 쪽 역시 독립운동가 김두전과 김두봉이 친척인 집안이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 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박차정 지사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일찍이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리운동가로 활약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 1월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그러나 근우회 사건으로 구금된 다음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차정 지사를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불렀고, 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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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밀양시는 친일파 음악가 박시춘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건립한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로구나. 이 책이 나올 때는 아직 건립이 안 되었고 여러 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있던 중인데, 지금 검색을 해보니, 다행히 아직 건립되지 않은 모양이구나.

 

1.

약산 김원봉은 19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중국으로 떠나 텐진, 난징, 센양 등에서 활동하가다 지린이라는 곳에서 고모부 황상규를 만나고 신흥무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단다. 신흥무관학교를 나오고, 1919 11 10일 지린시 광화로 57호에서 의열단을 만들었단다. 의열단 단장인 의백은 김원봉이 맡았지만, 고모부 황상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단다. 의열단의 공약 10조를 읽어보면 그들의 독립투쟁 의지를 엿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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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의열단 공약 10>

1.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히 자라야 의열단원이 된다.

4. 단의(團義)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도 급히 실행한다.

5. 의백 일인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케 한다.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식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초회(招會)(부름)에 반드시 응답한다.

8. 피사(被死)(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며 단의의 전력을 다한다.

9. 하나의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해 헌신한다.

10. 단의(團義)를 배반한 자는 척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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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은 박재혁, 김익상 등이 국내외 많은 활동을 해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단다. 아빠가 의열단 활동은 이전에 김원봉 관련 책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박재혁 님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만 책의 내용을 발췌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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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부산 출신 박재혁은 1920 9월 초 상하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1920 9 14일 고서상으로 위장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와 마주한다. 그리곤 고서 상자 속에서 미리 준비한 폭탄을 꺼내들고 하시모토에게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라고 외치며 폭탄을 투척한다. 폭탄에 맞은 서장은 수일 뒤 사망했다.

박재혁 역시 현장에서 폭탄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체포됐다. 1921 3,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상처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사형 선고 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라고 결심한 뒤 곡기를 끊고 단식하다 옥사하였다. 의열단다운 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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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진 김산도 의열단원으로 일했었단다. 김산은 김원봉, 김성숙과 가까웠고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고 하는데, 당시 베이징에 있던 의열단 본부의 위치를 정확히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구나. 이 책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의열단의 발자취를 쫓던 여행 가이드이기 때문에 의열단과 관련된 장소들을 찾아서 사진도 삽입되어 있단다. 의열단에 도움을 준 이들 중에는 단재 신채호, 이육사도 있어 그들의 흔적도 찾는 노력을 했단다.

아빠가 아는 독립운동가 중에 이태준이라는 분이 계신데, 이 분은 몽골에서 유명한 의사로 활동하던 분이야. 억울하게 러시아 백군에게 죽음을 당하는데, 그가 죽기 전에 폭탄제조 전문가인 헝가리 사람 마자알에게 의열단을 소개해주었고, 이태준이 죽은 이후 마자알은 혼자 의열단을 찾아와 도움을 주었단다. 이 이야기는 아빠가 예전에 읽은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에서 알게 된 이야기인데, 이 책에도 또 나오는구나. 이태준 님에 관한 책을 오래 전에 사두었는데 조만 간에 읽어봐야겠구나.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

의열단의 활동은 전에도 이야기했던 종로경찰서를 공격한 김상옥 의거,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의 황푸탄 의거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어. 불사신 김익상은 끝내 체포되어 21년간 형살이를 하고 풀려났는데, 다시 경찰이 데리고 간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오셩륜은 일제 말기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어.

….

의열단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보면 금륭대학이라는 곳이 있어. 오늘날은 난징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어. 금륭대학 강당에서 민족혁명당이 만들어졌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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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233)

그런데 이곳(금릉대학)이 우리 역사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돼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1935 7,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금릉대학교 강당인 대례당에 모여 민족혁명당을 만든다. 면면이 화려했는데 의열단 출신은 약산을 필두로 석정 윤세주, 진이로, 박효삼이 함께 했고, 신한독립당 출신으로 지청천과 신익희, 윤기섭이, 조선혁명당 출신은 최동오와 김학교가 함께 했다. 김두봉과 조소앙, 김규식, 김상덕, 최창익, 허정숙, 안광천 등도 동참했다. 22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김구는 위해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으나 마지막까지 고사했다.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위원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서기부와 조직부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다. 서기부의 부장은 약산, 조직부의 부장은 김두봉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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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두 거두라고 하면 약산 김원봉과 백범 김구를 들어 있어. 둘은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의 목표는 오직 조국의 독립이었단다. 임시정부 초창기에 김원봉에 잠시 참여했다가 실망한 후 다른 길을 갔지만, 1940년대에 들어서 그들은 다시 만나고, 당시 김원봉이 이끌었던 조선의용대는 김구의 한국광복군에 편입하게 된단다. 김구와 김원봉은 조선 독립을 위해 듯을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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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303)

두 사람(김구, 김원봉)은 진심으로 화합해 조국 독립을 바랐다.

우리 두 사람은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계속 분투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개의 강적에 대한 투쟁을 통일적으로 강하고 유력하게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군중을 떠난 우리 두 사람의 특수환경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나, 주로는 우리가 민족적 경각성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히 파악 실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거 수십 년간 우리 민족운동 사상의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중국민족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야 매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민족적 총 단결의 교훈을 이전의 착오를 통해 통감한다. 우리 두 사람은 신성한 조선 민족 해방의 대업을 위해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동포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와 현 단계의 우리 정치 주장을 이하에 진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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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임정 세력과 다시 손을 잡았지만, 여전히 임정 내부에서는 김원봉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구나. 그래도 결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조국에 돌아왔지만, 기다리는 것은 경찰이 된 친일파들이었지. 친일파를 청산하기는커녕 그들이 다시 경찰의 요직을 차지하고, 일제 치하에서도 잡혀 본 적이 없는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니. 거기에 여운형 등도 암살 당하는 남한 사회에 치를 떨었을 거야. 고향인 밀양을 뒤로 하고 북으로 가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북에 가서도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결국은 한국 전쟁 후에 숙청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잖니. 약산 김원봉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아빠가 더 억울하더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나라에서는 이제라고 공식적으로 그의 공적을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참 도발적이게도 난 약산 김원봉을 통해 반 토막 난 우리 독립운동사를 말하고 싶었다.

책의 끝 문장: 김약산을 기억한다.

 


밀양, 약산 김원봉이 태어난 도시다. 약산의 평생지기 석정 윤세주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약산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 애국지사만 80여 명이다. 안동과 더불어 인구대비 가장 많은 숫자다. 한마디로 독립유공자의 산실과 같은 장소다. 2018년 봄 약산의 생가터에 밀양시가 의열기념관을 세우고 나서 밀양을 찾아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그러나 2019년 들어 밀양시가 친일파 박시춘을 중심으로 한 <가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지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약산의 생질 김태영 박사와 밀양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요박물관 건립을 막고 있다. - P17

그러나 백민 황상규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족적을 남겼다. 1차 의열단 의거 실패 후 감옥에서 6년여를 보냈다. 출소 후에도 밀양에서 지역 운동을 전개하며 지역 리더로서의 역할을 실천했다. 1927년 12월부터는 신간회의 밀양지회장으로 선출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고문 등으로 이미 몸이 쇠약해진 상태, 한때 관운장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그였지만 과로 등이 겹치며 결핵성 복막염을 앓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황상규는 진상조사단이 돼 몸을 돌보지 않고 사건을 알렸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1930년 초 황상규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9월 황상규는 눈을 감는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폐결핵과 복막염 악화. 의열단의 정신적 스승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던 백민 황상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P103

김산은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성숙과 특히 사이가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자주 모임을 가질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이 만남은 훗날 ‘황포군관학교’라는 공통분모까지 이어진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단 김산과 약산 모두 책벌레였다. 특히 두 사람이 다 러시아 문학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그만큼 머리도 비상했다. 중앙학교-덕화학교당-금릉대-신흥무관학교를 거친 약산의 비상한 머리야 익히 알려진 바고, 김산 역시 신흥무관학교-난카이대-협화의대-황포군관학교-중산대 등을 거친 수재였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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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6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항일로드도 나왔던데 아직 못읽었네요. 김원봉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게 말이 안되는데도 여전히 그런 현실이..... 그래도 밀양 항일테마거리에 가면 항일기념관과 항일 체험관이 꽤 잘 꾸며져 있습니다. 밀양에는 독립운동가이자 김원봉님의 부인이었던 박차정님의 무덤이 있는데 김원봉님이 해방루 고향에 돌아올때 유골을 가져와 안장했어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산길을 헤매며 찾아간 무덤이 너무 하술하게 관리가 안되어서 많이 부끄럽고 가슴 아팠습니다

bookholic 2025-08-17 08:48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항일로드>는 리스트에 올려 놓겠습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념의 색깔을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밀양 여행을 가보겠습니다~~^^
댓글저장
 
















(13-14)

인간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무엇인가에 열광하게 되면 그 열망을 한 마디 환호성으로 표현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우연의 바람이 불현듯 하나의 이름을 던져준 행운의 날,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울림 좋고 날개가 돋친 듯한 그 낱말을 서슴없이 받아들여 새로 발견한 세계를 아메리카라는 새롭고 영원한 이름으로 맞이했다.


(22)

1200,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묘를 되찾았다가 다시 빼앗겼다. 순례는 헛된 것이었다. 아니다. 헛되지만은 않았다. 이 원정을 통해 유럽은 비로소 깨어났기 때문이다. 유럽은 스스로의 힘을 깨닫고 용기를 시험했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얼마나 새롭고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는지 다시금 알게 되었다. 전혀 다른 하늘 아래 다른 땅, 다른 열매, 다른 물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 다른 풍속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놀라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기사들과 시종들, 그리고 농부들은 자신들이 좁고 답답한 서양의 구석에서 얼마나 어리석게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반면에 사라센인들은 얼마나 풍요롭고 세련되게, 그리고 호화롭게 살아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42)

콜럼버스는 수천 개의 섬을 혼자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낙원에서 발원하는 강물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인도의 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 모든 섬들과 이 특이한 땅들이 어째서 고대와 아랍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마르코 폴로는 어찌해서 그것들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마르코 폴로가 말한 지팡구와 차이툰은 콜럼버스 제독이 발견한 땅과 얼마나 다른가? 그 모든 것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며 신비로 가득 차 있어서, 서쪽에 위치한 이 섬들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62-63)

베스푸치는 위대한 발견자인 콜럼버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냈다. 자신이 발견한 대륙이 앞으로 얼마나 큰 의미를 갖게 될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대륙의 남쪽 부분이 독립된 새로운 땅임을 정확히 인지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스푸치는 사실상 아메리카의 발견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발견이나 발명은 단지 그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의미와 영향을 인식한 사람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탐험과 발견이라는 공적을 세웠다면, 베스푸치는 앞서 언급한 선언을 통해 콜럼버스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라는 공적을 세웠다. 그는 앞선 사람이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며 발견한 것을, 마치 꿈의 해몽가처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84-85)

생디에의 인문주의자들은 출판물이 더 많은 관심을 얻을 수 있도록 후원자인 공작 르네를 세상 앞에 높이 기리기 위해 낭만적인 이야기를 꾸며냈다. 그들은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신대륙 발견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마치 자신들의 영주와 친밀한 친구이며 그를 숭배하는 사람인 양 꾸며댔다. <서한들>은 베스푸치가 직접 로트링겐의 영주에게 보낸 것이며, 이번에 출간되는 것이 그의 서한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공작에게는 얼마나 극진한 찬사인가! 당대의 위대한 학자로 널리 알려진 베스푸치는 이렇게 해서 스페인 왕뿐만 아니라 작은 공국의 군주에게도 자신의 항해에 대한 보고를 올리게 된 셈이다. 이 경건한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위대하신 분앞으로 쓰인 헌사는 가장 고귀한 레나투스 왕 폐하’(르네 2)께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번 판본이 기존의 이탈리아어 원본을 단순히 번역한 것이라는 흔적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다음과 같은 메모가 덧붙여졌다. 베스푸치가 이 저술을 프랑스어로 작성했고, ‘훌륭한 시인인 장 바쟁이 프랑스어에서 우아한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97-98)

지구상에서 북아메리카는 여전히 남아메리카와는 별개의 세계로 존재했다. 당시 사람들의 완고한 믿음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아시아의 일부라고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 속에 해협으로 아메리고의 대륙과 분리되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마침내 사람들은 이 대륙이 북쪽 빙해에서 남쪽 빙해까지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땅임을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확인하였고, 이 대륙에는 단 하나의 이름이 붙여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오류와 진실 사이에서 탄생한 이 무적의 단어가 그 불멸의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힘차게 일어섰다. 이미 1515년에 뉘른베르크의 지리학자 요하네스 쉐너는 자신이 제작한 지구의에 덧붙인 글에서 아메리카 또는 아메리겜을 신세계인 네 번째 대륙으로 공언했다.


(113-114)

학자들의 세계에서 베스푸치가 이토록 엄청난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출간한 매우 얇고 신뢰성이 다소 의심스러운 두 권의 책들이 학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권위를 부여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리학 입문>이라는 책이었다. 그러한 책을 최초로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베스푸치는 행동보다 말을 중시하는 학자들에 의해 서슴없이 신대륙의 발견자로 찬양받게 되었다. 지리학자인 쇼녀는 두 사람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으며 이렇게 말했다.

콜럼버스는 단지 몇몇 섬만을 발견했을 뿐이고, 베스푸치는 진정한 신세계를 발견했다.”


(128)

콜럼버스라는 한 인물이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후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부당한 처우를 겪었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콜럼버스는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그를 향한 모든 경멸과 그의 이미지에 드리워졌던 모든 그림자는 깨끗이 지워졌다. 사람들은 그의 형편없었던 통치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의 생애를 이상적으로 그려냈다. 그가 겪었던 어려움은 극적으로 부각되었다. 선원들의 모반을 제압하고 배를 끝까지 이끌었던 일, 한 악당의 음모로 쇠사슬에 묶여 고향으로 압송된 일, 굶주림에 처한 자식과 함께 라비다 수도원에 숨었던 일 등 이 모든 사건들은 이전에는 그의 업적을 칭송할 때 별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끊임없는 영웅화 욕구 덕분에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회자되었다.


(158-159)

다행히도 역사는 뛰어난 극작가다. 비극을 쓸 때처럼, 희극을 마무리할 때에도 그녀는 언제나 눈부신 결말을 마련해둔다. 4막 이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으며 최초로 본토에 발을 들인 사람도 그가 아니다. 그를 오랫동안 콜럼버스의 라이벌로 만들어 주었던 첫 번째 항해를 그는 결코 한 적이 없다. 그러나 학자들이 무대 위에서 베스푸치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항해들 가운데 몇 번을 실제로 했는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갑자기 한 인물이 무대 위로 올라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32쪽짜리 글은 결코 베스푸치가 쓴 것이 아니며, 그 글은 누군가가 베스푸치의 육필 원고를 멋대로 변형하여 만든 무책임하고 임의적인 조합물이라는 것이다.


(183-184)

4세기에 걸쳐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한 문제 중 하나를 던져준 이 남자는 정작 파란도 위대함도 없이, 소외된 채 조용히 흘러가는 삶을 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베스푸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영역을 넓힌 사람도 아니었다. 위대한 저술가도 아니었고,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한 학자도, 심오한 철학자도, 천문학자도 아니었으며 코페르니쿠스나 튀코 브라헤와 같은 인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를 위대한 항해자나 탐험가의 제일선에 놓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라도 모른다. 불운한 운명 탓에 어느 순간에도 주도권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쥐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나 마젤란처럼 함대를 지휘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주역이 아닌 조연에 머물렀고, 늘 다른 이들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185-186)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 것은 발견 자체가 아니라 발견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베스푸치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최초로 그것이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단 하나의 업적이 그의 삶과 이름에 영원히 결부된 것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행위를 이야기하고 설명한 사람이 그것을 실제로 해낸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계기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역사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역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종종 역사는 평범한 인물에게 불멸의 업적을 안겨주고, 진정으로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던져버렸다.


(1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는 자신의 세례명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그 이름은 올곧고 용감한 한 남자의 이름이다. 그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세 차례에 걸쳐 조그마한 배를 타고, 아직 탐험되지 않은 대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 역시 시대의 모험과 위험 속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수백 명의 이름 없는 선원들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민주주의 국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은 왕이나 정복자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없이 용감했던, 그런 평범한 사람이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는 서인도라든가 뉴잉글랜드, 뉴스페인 또는 성스러운 십자가의 나라 같은 이름보다 분명히 더 공정한 명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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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이건 메리언이 원하는 대로 불러요. 일지도 좋고 일기도 좋고 전능하신 메리언의 마법 연대기라고 불러도 난 상관없어요. 이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그걸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결정하면 돼요.” 그녀는 메리언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흔들며 스스로도 놀랄 만한 열성을 보인가. “나중에 기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해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의미까지도요. 자신에게 지니는 의미.”


(370)

지도에는 수많은 상징이 뿌려져 있었다. 도시. 비행장. 철도와 버려진 철도. 호수와 말라붙은 호수. 경주로를 나타내는 타원형과 유정탑을 나타내는 작은 유정탑. 점멸신호등을 나타내는 붉은 별. 깔끔하고 보기 좋은 단순화. 비행기가 격추되기 전까지는 그도 자신의 기술을, 삼차원의 공간과 인쇄된 지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나는 여기 있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로는 아무리 멀리 여행해도 늘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기분을, 고립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궤도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정식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지도로 표시될 수 있는 세계의 기저에 또다른, 포착하기 어려운 차원이 있는 것만 같았다.


(371)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든 걸 놓치고 지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대륙을 종단할 때 우리는 비행기 날개 너비밖에 되지 않는 하나의 길만 따라갈 것이며 오직 한 종류의 지평선만 볼 것이다. 동쪽으로는 아라비아와 인도, 중국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지나갈 것이고 유럽의 주둥이와 아시아의 꼬리를 가진 소련이라는 거대한 동물 또한 그렇게 보낼 것이다. 우리는 남아메리카도, 오스트레일리아나 그린란드, 버마, 몽골, 멕시코, 인도네시아도 전혀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주로 물을 볼 것이다. 우리는 주로 물을 볼 것이다. 액체 상태이거나 얼어붙은 물, 우리의 경로엔 주로 물이 있을 테니까.


(385)

우리는 진짜 두려울 때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고 싶은 갈급한 욕망을 느낀다. 고통과 공포를 체험하게 될 물체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체다. 우리가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으며 우리가 배 자체다. 하지만 비행에서는 두려움이 허용될 수 없다. 자기 안에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며, 그 다음엔 비행기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441)

가넷새의 돌진. 자신의 쓴 말이 떠오른다. 연료가 줄어드는 걸 바라보며 그 말대로 실천하리라 결심한다. 그렇게 결심하지만, 계속 날아간다. 살고 싶다는 걸 깨달은 걸까? 이 기억은 이상하게 빈 채로 남아 진실을 끌어내려는 그녀의 노력에 저항할 것이다. 나중에 그녀는 자신이 상반되는 바람들을 지녔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살고 싶은 동시에 죽고 싶고, 세상으로 돌아가 새 삶을 살면서 모든 걸 바꾸고 싶은 동시에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기도 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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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수확자 시리즈 1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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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닐 셔스터먼이라는 사람이 쓴 <수확자>란다. 수확이라고 하면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을 텐데, 그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수확자가 이 소설의 제목이란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이 수확하는 것은 곡식이 아니란다. 그럼 무엇일까? 책 표지가 그 힌트를 줄 것 같구나. 사실 아빠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강렬한 원색 표지의 책 표지 때문이었단다. 그 표지에는 날카롭고 큰 갈고리 같은 것을 든 사람이 있는데, 그 갈고리는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기구는 아님에 분명하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미래의 어느날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여 죽음이 사라진 세상이 되었으니, 유토피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구 조절을 위해 임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세상이니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이렇듯 인구 조절을 위해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수확자란다. 그러니까 수확자가 수확하는 것은 곡식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란다. 두 청소년이 수확자 수습생이 되면서 겪는 이야기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빠는 <헝거 게임> 시리즈가 생각이 났단다. <헝거 게임> 시리즈도 십대 청소년이 주인공이고, 미래의 디스토피아에서 일어나는 일이잖니. 그리고 한 사람만 생존한다는 콘셉이랑 살아남은 자가 그 시스템을 깨고 도망가는 것도 <헝거 게임>을 떠오르게 했단다. 그리고 <헝거 게임>처럼 3부작으로 되어 있고, <수확자>도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읽을 때 또 하나 떠오른 소설이 있었는데, 읽은 지 한참 지난 지금은 어떤 소설이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메모를 해 두어야 하는데…. 나중이라도 생각나면 이야기할게. , 그럼 <수확자>가 어떤 이야기인지 이야기해줄게.

 

1.

2042년부터 지구에서는 죽음이 사라졌단다. 사고사로 죽어도 재생이 가능하여 다시 살 수 있었어. 늙어도 회춘이라는 기술로 다시 젊어질 수도 있단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도 잘 모르고 살고 있었어. 그렇다고 그들에게 죽음의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야. 계속 불어나는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임의로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였고,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이 수확자란다. 열 여섯 살의 시트라와 로언은 어느날 수확자 패러데이에 선택을 받아 수확자 수습생이 된단다. 정식 수확자가 되면 이름을 유명한 위인들 중에 고를 수 있는데, 시트라와 로언의 멘토 수확자는 과학자 패러데이의 이름을 고른 것이란다.

수확자들에게는 수확 10계명이 있어. 그 중에는 매일 일기를 써야 한다는 아주 힘든 계명도 있고,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계명도 있단다. 하지만 죽음에서 면제되고 그것은 자신의 가족까지도 포함한단다. 수습생 시절은 1년이고 그 이후 정식 수확자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단다. 수습생 기간 동안 가족들에게도 죽음이 면제가 된단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 수확 방법은 칼, 총부터 약물까지 다양하단다. 명단이 정해지면 그 사람에게 가서 수확을 한다고 이야기하면 대상자는 바로 따를 수밖에 없었어. 만일 거부하거나 도망을 가게 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대신 수확당하게 돼.

, 이 정도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비록 죽음이 사라진 세상이지만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라고 하는 게 맞겠지? 수확 대상은 어떻게 고르냐과거 죽음의 시대의 사망률을 참고하고 과거의 기준으로 사망 확률이 높은 사람, 예를 들어 담배를 피거나 운전을 범하게 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우선 선정하지만, 수확자의 권한이 더 크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정해진 기간에 수확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제한되어 있단다. 가끔 어떤 수확자는 동료 수확자들과 함께 비행기 탑승객 전체를 수확하는 경우도 있단다. 죽음의 시대 비행기 사고를 가정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수확이 아니고 살인 같이 보였단다.

수확자들은 로브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는단다. 그리고 계절별로 회합을 갖는데 그들은 그 명칭을 콘클라베라고 한단다. 콘클라베라고 하면 교황이 선종에 이른 후 새로운 교황을 뽑기 위한 추기경들의 모임을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수확자들의 모임으로 쓰인단다. 그리고 이 세상은 선더헤드라는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되고 감시 받는단다. 그래서 선서헤드는 신과 같은 존재란다.

 

2.

시트라와 로언이 수습생이 되고 참석한 두 번째 콘클라베에서 어떤 수확자들이 패더데이가 두 명의 수습생을 둔 것에 이의를 제기했어. 그래서 정식 수확자는 한 명이 되어야 하고, 떨어진 수확자는 합격한 수확자에게 수확당하는 것을 제안했단다. 그런데 이 제안이 재미있다면서 회의에서 통과되었단다. 지은이는 소설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이런 설정을 한 것 같구나. 이제 시트라와 로언은 둘 중에 한 명은 죽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구나. 그런데 시트라와 로언은 수습 생활을 같이 하면서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었단다. 특히 로언은 시트라에 첫 눈에 반했었어. 하지만 수확자는 결혼을 못하니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했단다. 그런데 둘 중에 한 명은 죽어야 한다니그것도 상대방으로부터 말이야

이것은 패러데이에게도 큰 고민거리였나 봐. 결국 이 문제는 패러데이가 해결을 한단다. 수확자는 자신을 수확할 수 있는데, 패러데이는 그 일을 벌였단다. 결국 시트라와 로언은 멘토를 잃게 되었고, 다른 수확자 밑에서 수습 생활을 하게 되었어. 시트라는 죽음의 대모라고 부르는 퀴리의 수습생이 되었고, 로언은 고더드라는 수확자의 수습생이 되었어. 그런데 고더드는 가장 악명 높은 수확자 중에 한 명으로 그는 혼자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비행기 단체 수확 같이 잔인한 수확을 즐긴단다. 이제 수확자 한 명에 수습생 한 명이니, 콘클라베의 결정을 백지화되어야겠지만, 이 잔인한 수확자들은 여전히 그 결정은 유효하다고 했단다.

로언은 자신이 시트라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점수를 못 받는 행위를 했단다. 그래서 시트라가 합격이 될 수 있게 말이야. 그런데 시트라는 페러데이의 죽음의 의문을 갖고 있었어.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자살이었기 때문이야. 감시카메라를 조사하던 중 패러데이가 수확하는 장면만 지워지고 없었고, 그 사건을 목격한 목격자에게 죽음을 면제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패러데이는 누군가에게 타살 당한 것이라고 의심을 했단다. 당연히 고더드가 범인일 거라 생각했지. 추계 콘클라베에서 로언을 만난 시트라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어. 한편 로언은 고더드 밑에서 잔인한 수확 행위를 보면서, 처음에는 강하게 거부했지만 점점 그를 따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어. 그러면서 그런 자신에게 강한 혐오감을 느꼈단다.

추계 콘클라베에서는 시트라와 로언이 시합을 하는 테스트가 있었는데, 로언은 반칙을 해서 실격 처리하는 행위를 했단다. 시트라에게 져주기 위한 행동이었어. 그래야만 잔인한 고더드 밑에서 수확일을 하지 않을 수 있고, 시트라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시트라는 자신의 멘토 퀴리에게 패러데이의 죽음에 의문점이 있다면서 증거를 이야기했어. 그런데 얼마 후 시트라는 오히려 패더데이의 살해 용의자로 체포된단다. 시트라는 죽었다가 회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도망을 갔고, 퀴리는 시트라의 도망을 도우면서 제럴드 백 데어 반스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바로 패러데이였던 것이란다.

패러데이는 죽은 척 하고 멀리 칠아르헨티나라는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어. 더 이상 수확자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방법이 없어서 자살로 위장하고 숨어 지내는 거야. 일종의 은퇴지. 퀴리가 시트라의 무죄를 입증하면서 시트라는 살해 용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다.

한편 로언의 멘토 고더드는 세력을 점점 확장시키면서 수확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나갔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점점 늘어갔어. 그리고 수확 방법도 점점 잔인해졌어. 로언도 어떨 수 없이 따라 나서야 했어. 어느날은 음파교단수도원이라는 곳을 집단 수확을 했는데, 어린 아이까지 수확을 하게 되었어. 고더드의 일행 중에 볼타는 이것을 보고 죄책감에 스스로 수확을 하고 죽었단다. 로언도 이런 잔인한 수확 행위는 살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는 고더드와 그의 일행들을 모두 죽이고 불을 질러버렸단다. 대부분의 죽은 회생할 수 있지만, 화재로 뼈까지 타버리고 나면 회생을 할 수가 없었단다. 로언은 화재로 수확자들 일행이 죽었다고 보고했고, 로언의 짓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지만, 고위관리자는 눈엣가시였던 고더드가 사라진 것에 내심 좋아하며 사고사로 종결했단다.

, 이제 동계 콘클라베가 남았단다. 동계 콘클라베에서 누가 수확자가 될지 결정된단다. 과연 시트라는 수확자로 선정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로언은 죽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시트라는 로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멘토 패러데이는 어떤 역할을 이어갈까. 그렇게 1권의 마무리가 된단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수확자> 시리즌 모두 세 권이란다. 지금 생각으로는 나머지 두 권을 읽을지는 현재로서는 모르겠다. 1권이 아주 재미있었던 것도 아니고,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으니 말이야. 나중에 산더미 같은 책들이 좀 줄어들면 그때 생각해봐야겠다.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우리는 법에 따라 우리가 죽이는 무고한 이들을 기록해야 한다.

책의 끝 문장: 언젠가 그 자신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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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4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이 사라져서 인구조절을 누군가가 생명을 거두는 일을 한다니... 너무 디스토피아예요.

bookholic 2025-08-15 22:27   좋아요 1 | URL
기후 변화로 인해 실제 세계도 점점 디스토피아가 될까, 걱정입니다.ㅠㅠ
즐거운 연휴 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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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426)

지금은 나미비아가 된 나라에서 메리언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 밤에 이 발코니의 특별한 각도에서 본 이 특별한 달을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만일 잊는다면, 내가 무얼 잊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망각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잊었다. 내가 본 거의 모든 것을 잊었다. 체험은 더해나 물결처럼 우리에게 밀려든다. 기억은 병에 담긴 물 한 방울이며, 그 짜고 농축된 물방울은 그것이 속해 있던 신선하고 풍성한 물결과는 다르다.


(457)

왜냐하면 비행은 당신 뼛속에 있으니까.” 메리언은 놀라서 희미하게 빛나는 그의 흰 셔츠 위에 그림자 진 얼굴을 빤히 보았다. 자신도 그렇게 믿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입을 열 사이도 없이 그가 덧붙였다. “내가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이 그랬어. 당신은 내 뼛속에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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